당신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선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부담스럽지만,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약 신이 있다면, 구원을 받는 사람은 특정한 행위를 보여준 몇몇 사람일 것이라 가정합니다. 약한 자를 도와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 국가적인 영웅 같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사람이 천국에 갈까요? 이것은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정한 선의 기준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곁에 영원히 머무는 복을 받는 자들은 선을 많이 행한 사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순대국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정도 순대국을 입에 대지 못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동네 순대국 가게에서 포장을 해 오면 홀에서 식사할 때보다 양을 많이 줘서 종종 포장을 해서 사 먹었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데, 어머니께서 집에 순대국 사다 놨으니 댑혀 먹으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양이 많아서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먹고 제 것을 남겨놓았는데, 들어가보니 순대국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안 먹었냐 물어보니, 아내가 집에 있는 들깨가루를 넣었는데, 그 들깨가루가 상해서 거의 입을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살짝 구역질이 났지만,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서 국물은 거의 남기고 건더기를 모두 건져 먹었습니다. 그때 먹었던 순대국의 냄새가 머릿속에 남아 그다음부터는 순대국만 생각하면 속이 매스꺼웠습니다. 순대국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지만, 그 음식에 넣은 상한 가루 한 스푼이 그 큰 냄비를 가득 채운 순대국의 모든 맛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이렇게 구역질 나는 음식과 비슷합니다. 수십, 혹은 수백 가지 재료를 써서 아무리 성의 있게 음식을 만들어도, 그중 한 가지 재료만 상해도 목구멍으로 넘기기 어려운 구역질 나는 음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음식은 아무리 신선하고 새로운 재료를 쏟아 부어도 절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선한 행위로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요리했다 할지라도, 삶에서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로 상한 재료를 넣는 순간 그 삶은 먹을 수 없는 죄인의 삶이 될 뿐입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이러한 죄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그래서 구원의 가장 첫 단계는 내가 쌓아 올린 인생이라는 음식이 죄로 인해 악취나 음식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본인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없이 기쁘고 무한히 감사한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은 우리에게 이력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충성했고, 얼마나 봉헌했는가 등등의 내용을 적어내려가며 손등에 땀이 맺힙니다. 혹시라도 내 이력서가 신에게 거절 판결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많은 종교인들이 오늘도 좋은 이력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도 어떤 점에서는 이들과 비슷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천국으로 가기 위한 이력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력서에는 나의 이름과 나의 노력과 나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 이력서에는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믿음을 담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러한 가치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자랑하며 살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사랑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겸손하십시오. 우리의 육신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살 때, 새벽에 울월스라는 대형 마켓을 청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매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닥에서 길에 뻗은 먼지 쓸이 빗자루를 가지고 선반 아래 바닥을 구석구석 훑어서 먼지와 쓰레기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할 때,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실수로 떨어뜨린 동전들이 빗자루에 걸려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주에는 동전이 5센트부터 2불까지 있는데, 가치로 보면 5센트짜리 동전 40개를 모아야 2불이 되니 2불짜리 동전을 줍는 날은 기념으로 귀갓길에 맥도날드에 들러 1불짜리 커피 한 잔을 사 마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며 동전을 모으다 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치가 있는 1불 동전이나 2불 동전을 들고 다니는데, 제가 줍는 대부분의 돈들은 5센트 동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5센트는 당시 한화로 50원이었으니, 손으로 한 뭉치를 모아도 어디다 쓸 데가 없는 동전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5센트 동전을 가장 많이 떨어뜨릴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그것은 사람들이 5센트 동전을 가장 많이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5센트 동전은 줍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전 5센트를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이것도 계속 모으면 적잖은 돈이 될 것 같다고 조금씩 모았고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은, 혹은 줍지 않아 모인 5센트 동전은 제 차량 왼쪽에 봉투에 담겨진 채로 한 주먹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은행에 가서 계좌에 넣어야겠다 다짐은 했지만, 그 동전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것을 들고 은행원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민폐가 될까 생각이 돼서 결국 그 5센트 동전은 호주에 있는 내내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5센트, 허리를 한 번 숙여서 손가락으로 집는 행위조차 아까운 그 5센트가 바로 죄인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고 낮은 자인지 깨닫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한 약함과 부족함이 나의 자랑이 되어 삶의 모든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도록 우리의 삶을 계획한 것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의 성공을 우리의 외모와 실력에 기인한 것으로 주장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나 이번에 공부 하나도 안 했어”라는 말입니다. 10년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나 진짜 이번엔 죽어라 공부했어.”라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 성적이 잘 나오면,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이 잘 나오는 좋은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은근중에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TV에 나오는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성형 사실을 감추고 드러내길 꺼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은 노력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원래 예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SNS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주변 이웃들의 소식은 어떻습니까? 별것 아닌 일상생활 속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게시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매 순간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는 영광을 내가 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신의 가시를 두어 그의 사역이 승승장구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제자들이 순교하여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전파되고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믿는다는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육신의 가시를 없애달라는 것이 되고, 이 땅의 교회가 힘을 얻게 해달라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가시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통해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삶을 마치는 날,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아, 저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어.”라는 말보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없다면 설명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라는 말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