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난이 문을 두드릴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여리고성에 거주하는 기생 라합이 등장합니다. 이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감춰주어 여리고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무리하고, 요단강 동쪽 모압 평지에 머물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지도자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뀌었고, 눈앞에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은 첫 성읍, 여리고가 높고 견고한 성벽을 두르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유목 생활을 하던 초라한 나그네 민족처럼 보였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애굽의 재앙과 홍해 사건, 그리고 요단 건너까지 올라온 이스라엘의 소문을 들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라합은 여리고성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눈에 보이는 성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정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먼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택하고 예수님의 조상으로 이름을 올린 라합을 통해 믿음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자들 중,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던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바로와 애굽의 귀족들은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셉 때부터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모세 때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습니다. 모압의 발락 왕과 발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가 의지했던 거짓 예언가 발람 역시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는 말만 하겠다며 발락의 요청대로 예언을 뱉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하나님의 권능은 인정은 했으나,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9-10)
이미 여리고성에 있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한 일을 듣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튼튼한 성벽과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을 제외한 여리고성의 모든 백성들의 믿음은 수동적 믿음, 즉 하나님을 알고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은 이전에 언급된 애굽과 모압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깨닫는다는 의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수리점”이라는 책에서 조동욱 목사님은 이러한 믿음의 속성을 운전을 배우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운전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운전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익혀야 합니다. 누구는 책을 사서 열심히 공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면허학원을 다니기도 합니다. 운전을 하기 위한 배경 지식을 모두 익힌 후에는 자동차의 기본적인 구동 원리를 익혀야 합니다. 어떤 것이 브레이크 패드이고 어떤 것이 엑셀인지, 어떤 것이 경고등이고 어떤 것이 깜빡이인지 확인해야 하고, 자동차 메뉴얼도 꼼꼼하게 읽어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지 않도록 만일의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이 모든 준비는 딱 한 가지 목표, 바로 운전대를 잡고 어딘가로 가고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과정을 철저히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운전은 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위해 지식을 쌓았으나, 정작 운전은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수동적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애초에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수동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위해선 반드시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출신 곡예사인 샤를 블롱댕의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1859년,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길이 약 335m, 높이 약 50m의 외줄을 설치하고 여러 차례 왕복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줄 위에서 눈을 가리고 걷고 술통을 끌고 가기도 하고 심지어 줄 위에서 달걀을 요리해 먹기도 했습니다. 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손수레를 밀며 외쳤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손수레를 타고 다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며 “믿는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블롱댕은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손수레에 타서 나와 함께 건널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수천 명의 관중 중 단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 수레로 걸음을 옮기지 않은 것으로 자신들의 마음 속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깊은 그리스도인, 말씀을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삶에서 믿음으로 증명하는 동적인 믿음을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있습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자들이 여리고 왕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정탐꾼들 입장에서는 시작부터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고, 라합의 입장에서는 왕명을 지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이제 라합은 외줄의 손수레를 탑승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든,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수동적 믿음에서 멈출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건 손수레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말했던 수많은 여리고 백성들이 결코 선택하지 못한 결정을 실제로 실행한 믿음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을 보며 그를 경외하는 믿음은 보여주었으나, 그들은 마치 외줄 아래 관중석에 앉아 박수를 치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면 라합은 말로만 믿지 않고 자신의 발을 옮겨 외줄을 타는 곡예사의 손수레에 스스로 올라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찾아와서 목숨을 건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라합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낼 틈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고난을 수반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믿는다는 고백을 드렸을 때 드러난 것이 아니라, 백 살에 얻은 외아들을 번제로 드릴 때 드러났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그가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 때 드러났고 다윗의 믿음은 돌멩이를 들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때 드러났습니다. 라합의 믿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정탐꾼들을 숨겨 줄 때, 자신의 왕에게 거짓말을 할 때, 밤중에 밧줄로 그들을 성벽 아래로 내려 보낼 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홍해라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골리앗이라는 전쟁영웅과 맞닥들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정탐꾼이 우리의 집에 찾아왔을 때, 우리의 믿음이 수동적 믿음에서 능동적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종종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애초에 이것이 찾아오지 않도록, 혹은 이것이 찾아오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앞에서 말한 믿음의 조상들이 말 그대로 ‘믿음‘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해 준 사건이 애초에 그들에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세상에 믿음을 보이고 무엇으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겠습니까? 가장 극적이고, 가장 사랑받는 성경 이야기들은 모두 자신들의 믿음을 고난 가운데 증명해 낸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즐기고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그러한 순간을 처음부터 피하고자 한다면, 믿는다는 말만 하며 박수만 치는 관객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께 고난을 기대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결코 여러분이 견딜 만하거나 쉽사리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고난을 좋아하고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마치 군인이 때가 되어 받는 훈련과 같습니다. 저는 아내를 만난 이후 헬스장을 다니지 않다가, 지난달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아침에 운동을 가는 일이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또 가서 운동하는 사람 보면 웃으면서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힘들어서 인상 쓰고 흘리는 땀을 닦아가며 운동합니다. 며칠 전에 저녁에 헬스장에 갔는데, 문을 닫기 전이라 그런지 헬스장에서 나오는 음악이 30분 정도 중단됐습니다. 음악 없는 헬스장은 처음이었는데, 음악이 없으니까 정말 끔찍합니다. 기계가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사람들 신음 섞인 거친 숨소리가 마치 고문을 받는 수용소에 온 기분이 들었고, 왜 헬스장에서는 음악을 크게 트는지 몸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 고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든 것을 즐겨서가 아니라,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건강의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동시에 나의 믿음이 정말 믿음인지 드러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도구이므로 그것을 영적 유익으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 밖에서 정탐꾼들이 집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집 앞에서 그들이 노크를 할 때, “아, 왜 하필 우리 집에 왔지..“하며 절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라합처럼 준비된 모습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고난의 순간에 관객이 아닌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빛나는 믿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