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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dsbyme Nov 20. 2022

손에 익어간다는 것 :: 결심의 순간

"익숙해지다"와 "익어간다"의 차이

1. 일이 손에 익는다- 갓 1년 넘은 신입사원, 혹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고 있는 월급쟁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국어 전문가가 아닌 내가 감히 추측건데, 여기서 "익다"라는 표현은 "익숙하다"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근데 괜시리, 나에겐 "익다"라는 표현이 요리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싱싱하고 빳빳하지만, 우리가 생으로 먹기엔 다소 거친 채소와 고기를 우리는 뜨거운 물에 익히곤 한다. 갓 수확(혹은 도축) 했던 시기보단 싱그러움이 덜하지만, 고기와 채소는 진한 육수와 함께 먹기 좋은 상태로 거듭난다. 나는 "손에 일이 익을 때"가 바로 우리가 푹 익은 고기처럼 사회에 맞는 "잘 익은 수육"이 되는 시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2. 사실 무언가를 익힌다는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요하는 일이다. 물의 양을 너무 적게하면 익기 전에 타버리기 부지기수고, 물의 양이 너무 많으면 한참을 기다려야한다. 즉, 적당한 양의 물과 노력치가 맞물릴 때 비로소 맛이 좋은 그럴듯한 음식이 탄생한다.


어찌보면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회사가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신입사원은 자신도 모르는 새 온갖 스트레스와 함께 새까맣게 타버리곤 한다. 그리고 이 상태로 2~3년차가 되면, 연차와 어울리지 않는 "번아웃"이란 이름의 심리적 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3. 1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스스로가 얼마나 회사, 사회에서 잘 "익혀진" 사람인지 알지 못한채 일상의 톱니바퀴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비슷한 또래의 월급쟁이들은 "잘못된 환경에서 익혀진다"라는게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작정 회사에 모든걸 기대하기보단,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요즘 2030은 대기업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일이 손에 익어가고 적당히 사회라는 새로운 식재료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욱 빛내줄 새로운 조리사를 찾아 과감하게 도전한다. 젊은층의 이직률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이유다.


여전히 일이 손에 익다 못해 들러 붙을 수준의 "장인 정신"을 기대하는 기성세대에게, 이러한 변화를 썩 달가워하진 않는다. "네카라쿠배당토"와 같은 젊은 기업들이 이직 분위기를 조성하자, 대기업들은 앞다퉈 "사내 문화개선" "일하고 싶은 회사" 등의 슬로건을 앞세워 SNS 채널을 만들고 PR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눈에 띄는 신입 채용 확대는 없이 경력직을 선호하면서 말이다.


4.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이 손에 익다 못해, 달라 붙는 지경까지 올때까지 나는 부족하다고 자책하고 의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5~6년의 시간을 긴장하며, 그리고 인정을 갈망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어느순간, 당장 눈 앞의 보고 승인에만 급급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해내고 달성했을때 뿌듯해하던 내 모습은, 마치 뚝배기 속 수육이 원래의 선홍빛 자태를 잃어가듯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내가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던것 같다.


5.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결론은 난 손에 익은 일을 그만두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 떠났다. 아이러니한건, 뜨거운 일을 마주하며 내 손에 깊게 박힌 화상의 흔적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그 존재감을 뽐낸다는 것이다.


OO회사 출신, XX업계 출신 등 경력직들이 이름보단 그들의 경력으로 평가 받는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환경은 분명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여전히 그들은 손에 남은 작은 흔적들이 이끄는대로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고 싶어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6. 글을 쓰다보니 매우 비유적이고, 나조차도 알아먹기 어렵게 써둔 느낌이 강하다. 한번 쓱 읽어본 후,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발행하는게 맞을지 잠시간 고민한다. 그리고 이 역시도, 메일 한통을 쓰고도 몇번을 검토하는 "손에 익은" 내 습관이란 생각에 잠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브런치란 공간에서라도, 난 잠시간 사회와 일상에서 손에 박힌 내 화상의 흔적을 지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회사에서라면 절대 하고 싶지않은 시덥잖은 소리로 제법 많은 글자수를 채웠지만, 여기서만큼은 아무 고민없이 쭉 써내려간 글의 "발행" 버튼을 눌러보려 한다. 적어도 브런치에서만큼은, 난 "글쓰는게 손에 익은 작가"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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