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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May 22. 2020

너와 나, 그리고 '오베'라는 남자

영화 <오베라는 남자>(2016)



 노인 문제는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통계청이 13일 발표한 ‘2019 한국의 사회 동향’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14% 정도인 65세 고령 인구가 50년 후인 2067년에는 47%로 늘어날 예정이다. 이처럼 사회에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노인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 중 하나이지만,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노인 문제의 핵심은 현대 사회가 ‘늙어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근대적 세계관이다. 근대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와 근원적으로 분리된 개체이며, 곧 개체의 죽음은 해당 개체의 종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늙어간다는 것은 죽음으로 수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근대적 세계관은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젊은이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며 현대인들은 늙음과 죽음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노인들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부정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의 모습은 영화 <오베라는 남자>에서도 드러난다. 오베는 59세의 남자로, 매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마을을 순찰하고, 자신이 만든 ‘규칙’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내색하지 않고 직장에 나가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 뿐이다. 오베는 마을에서 일명 ‘꼰대’로 통한다. 그를 좋아하는 이웃 또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베는 스스로를 더욱더 고립시키고 소외된 노인으로 남기를 자처한다. 오베 또한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킬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베의 일상은 새로운 이웃들의 등장으로 변화해간다. 오베는 점점 자신을 고립시키던 자신의 원칙에서 벗어나 사회의 일부분으로 통합된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노인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사회의 변화에 적응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근대적 세계관이 유입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늙어감’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교적 관점에 따르면 ‘늙어감’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이며, 인간 성숙의 과정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삶은 더욱 견고해진다. 유교는 통일체적 세계관을 따르는데, 그러한 관점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성숙한 사회의 일부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근대적 세계관이 바라보는 ‘늙어감’과는 차이가 있다. 근대의 관점에서 늙고 죽는다는 것은 사회에서 불필요한 역할로 전락하는 것이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늙고 죽는다는 것은 그저 자연과 사회의 순리를 따르는 일이다. 우리는 일부 개체에 불과하지 않으며, 우리의 과거 세대, 미래 세대는 함께 ‘우리’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죽어서도 사회의 일부로 작용하며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와 같은 전통적 관점들은 노인을 경험으로부터 지혜를 얻은 사회의 성숙하고 원숙한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


 하지만 현대의 관점은 다르다. 현대 사회는 ‘늙어감’을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일명 ‘꼰대’ 취급을 받으며 노인들의 경험은 단순히 사회와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적극적으로 노인을 혐오한다. 노인이 가진 특성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판단을 하며 노인들 또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노인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 의해 사회적으로 배제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노인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배제되는데, 그중 노인의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회적 영역에서의 배제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도 볼 수 있듯, 오베는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사회적 영역에서 배제시킨다. 자신의 원칙에 대해 아무도 존중해 주지 않으며 자기 자신 또한 자신의 원칙에 대해 타인과 대화를 통해 공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적 시선으로 노인을 혐오하는 이웃들의 시선과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회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베가 결국 이웃들과의 소통을 통해 마음을 열고 마을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노인의 사회적 관계는 노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물질적, 심리적 자원으로 작용한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노인들은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관계 형성을 통해 얻은 사회적 인정은 노인들의 심리와 신체 모두의 안정을 보장한다. 특히 가족과의 유대감 형성은 노인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사회적 환경은 지속적인 사회적 압력을 통해 그 사람이 역할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노인’의 모습에 따라 자신들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근대적 관점에서 노인들은 사회에서 한 발자국 빠진 존재들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기회와 주체성을 ‘젊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주체적 행위자가 되지 못하는 노인은 계속해서 기회를 잃게 된다. 하지만 근대 사회는 ‘사회 보장제도’와 같은 정책을 통해 사회 배제 계층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며 사회 구성원들은 노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미디어를 포함한 사회적 수단이 단순히 노인을 소외당하는 존재로 계속해서 노출시키는 미디엄(medium)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인에게 또 다른 사회적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에 해당할 수 있다. <오베라는 남자>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오베는 이웃들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 속에 편입되어 전보다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전의 오베는 우울하고 고립되어있다. 이는 일종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노인에 대한 프레임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오베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오베의 이미지는 우리 주위의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에 해당한다. 우리는 고독감에 휩싸인 노인에 대해 듣는 것보다, 행복감과 주체성으로 가득 찬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있어서 더 낯설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고립된 노인들에 대해 접하고, 그에 따른 노인의 이미지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노인 문제를 부각하고 사회에 전달하려는 매체들이 단독적인 관점으로 배포된다면 결국 그것은 노인에 대한 프레임에 불과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가 노인 소외를 재생산해내는 미디엄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노인들의 주체적 정체성 형성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 영화제, 시니어 연극제와 같은 문화 프로그램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문화 프로그램은 노인의 행복감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생활무용 교육에 참여한 노인들의 행복감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생활무용 참여 노인의 자기 효능감은 심리적 행복감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결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 생활무용을 경험하면서 자신감과 자기 조절 효능감이 높아져 이것이 노인의 심리적 행복감 향상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노인의 자아 주체성은 사회와 상호작용할수록 긍정적 성격을 띤다. 또한 사회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는 노인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노인에 대한 내용을 전달할 때 부정적 부분이 아닌, 긍정적 모습에 대해 초점을 두고 전달한다면 노인들의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프로그램 참여를 단순히 노인 개인에게 맡겨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일반국민 대비 취약계층의 디지털 정보화 역량 수준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며, 그중 장노년층은 41%로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노인에게 알아서 사회 참여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말하는 것은 노인문제를 방치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사회는 적극적으로 노인의 사회참여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노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힘써야 한다.      





 <오베라는 남자> 속 오베는 운 좋게도 자신을 사회로 이끌어줄 마음씨 좋은 이웃을 만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웃에 의해 사회로 편입되는 오베도, 마을의 ‘꼰대’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이웃도 찾기 힘들다. 오베가 다시금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이웃들의 노력과 사회 속으로 편입되려 한 오베 스스로의 노력 두 가지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은 변화하는 사회를 받아들이며 사회 변화에 자신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노인들 또한 변화하는 사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자신을 맞추라고 말만 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폭력에 해당할 수 있다. 노인들의 활동 분야는 제한되어 있고, 실질적인 참여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실제 문화시설이나 대중매체를 포함하여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많은 것들은 노인에게 심리적 위축과 사회적 배제를 경험시킨다. 또한 사회적 측면에서 노인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 시간이 흐르면 노인이 된다. 노인이 겪는 사회적 소외감을 다음 세대가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생각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언젠가 '오베'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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