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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할 윤 Aug 13. 2021

베를린의 노을이 건네는 위로

독일 교환학생 비하인드 스토리 #11 최악의 하루가 최고의 하루로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노을 사진 찍기' 이다. 요즘은 서울 하늘이 예쁘게 물들 때가 많아서 핸드폰에 하늘 사진이 한 가득이다. 노을 사진 찍는 걸 좋아하게 된 계기는 베를린에서 가장 최악의 하루를 보내며 인생 최고의 노을을 봤기 때문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2019년 겨울, 교환학생 학기가 종강하고 독일의 대도시들을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함부르크에서 버스를 타고 베를린으로 넘어온 후 숙소에 갔다가 구경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던 필름카메라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버스회사 사무소에 가서 간절하게 문의를 했지만 습득된 카메라는 없다는 단호한 답변을 받았다. 유럽에서 물건 잃어버리면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절실히 와닿을 줄이야. 내가 어린이 였을 때부터 함께 했던 카메라였기에 속상한 마음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그래도 손꼽아 기다렸던 베를린 여행을 망칠 수 없기에 최대한 잊으려 노력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국 가수의 베를린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연 하나만 바라보고 베를린에 왔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가는데 하필 공연장이 베를린 외곽에 있어서 가는데 꽤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매표소는 닫혀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공연이 열린 장소였던 콜롬비아 할레

'공연 2시간 전인데 매표소는 열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며 매표소에 붙여 있던 종이를 본 순간,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수의 건강 악화로 오늘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3일 전에 가수가 긴급수술을 받게 되어 이후 공연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안내문자 한 통 주는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왜 불행한 일은 한번에 몰릴까? 정말 지지리도 운 없던 날이었다.


당시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두 번이나 잃고 나니 눈물이 저절로 고였다. 한 시간 넘게 멍하니 길거리를 걸었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면 오늘이 최악의 하루로 끝날 것 같아서 계속 걷기만 했다. 후회와 자책을 반복하다가 고개를 딱 들었을 때 최고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포츠담 플라츠 거리


살면서 하늘이 이렇게 분홍빛으로 물든건 처음 봤다. 그 하늘을 봤을 때 마음이 되게 따뜻해졌다. '최악의 하루를 겪은 대신 아름다운 노을을 보게 됐구나. 이걸로 충분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벤치에 앉아서 노을이 다 질 때까지 하늘을 보았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 날의 노을은 내가 받은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요즘도 노을 지는 하늘을 볼 때면 베를린 생각이 많이 난다. 베를린 만큼은 아니더라도 노을은 언제나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위로가 된다. 앞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힘든 일들을 마주하겠지만, 그 때마다 베를린의 노을을 찾아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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