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앵 Jul 09. 2020

시간을 돌리는 쟁반


사실 난 20년 정도 늦게 태어났다. 30대 중후반이 될 때까지 우리 부모님은 서로 만날 턱이 없어보였고 삼신할매는 되는대로 빨리 그들에게 누락된 아이 하나를 점지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일단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위해 한 겨울에 장갑 없이 자전거 타기는 물론이고 아침에는 tv유치원을 보며 등교하고, 하교하고 나서는 TV와 컴퓨터를 달고 살았다. 신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사느라 잊고 있던 내 본질을 다시 떠올린 건 초등학생 때였다. 한 시트콤에서 이문세 노래가 나온 것이다. 


비 오는 풍경 뒤로 오카리나 색깔의 전주가 나오고 이문세의 무심한 노랫말이 이어 나오는 순간, 당시 오정반합과 같은 뜻 모를 반사회적인 노래 아니면 발라드를 듣던 나에게 제 3세계의 문이 열렸다. 또는 내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고 뭘 하던 사람인지 파노라마처럼 장면들이 스쳐지나가며 깨달은 느낌이었달까. 


LP판이라는 걸 알고나서부터는 내가 몇십년은 늦게 태어났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엄마아빠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담같은 LP판. 음원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야 그 한물 간 판을 찾는 사람이 자식으로 태어나버린 엄마는 내가 중고로 LP를 사 모을 때마다 그런 말을 한다. 니가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지 말걸. 


제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좋았겠지. 아마 엄마처럼 알이 대빵 큰 안경을 쓰고 있었을거다. 그리고 엄마 자식이 아니라 친구였을 거고. 그럼 아빠를 만나는 소개팅을 몰래 지켜봤겠지. 잘 생각해. 마흔이 다되도록 배가 안나왔다는 점에 넘어가지마. 그래도 착해보이긴 하다는 언질을 주면서.. 다방에서 음악도 들으며 학문당에서 친구를 만나는 인생.


이 요상한 취미는 가끔 나를 그리울 리 없는 그때를 그립게 한다.


그렇다고 삼신할매를 원망하진 않는다. 늦게 태어난 덕분에 LP를 보면 나를 떠올리는 친구들을 만났고 엄마아빠를 삐끗하면 안봐도 되는 사이가 아닌, 그럼에도 지겹게 봐야하는 부모자식으로 연을 맺은 것. 음악 찾아 듣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 다양한 음악들을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사는 동시에 원래 태어났을 시대의 음악도 즐기고 있으니까. 시대를 잘 태어나고 잘못 태어나는 건 없구나. 저마다 시의적절하게 태어나는구나. 그러므로 오늘도, 세상에 태어나기 더할 나위 없는 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