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앵 Feb 05. 2021

성장형 캐릭터


 보통 나 자신은 내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을 해가며 '나' 백과사전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줘야 한다. 달라진 건 수정도 해줘야 하고. 물리적 나이와 심리적 나이 사이의 간극도 너무 벌어지지 않게 자주 따라가 줘야 한다.


기억을 김치처럼 장독대에 묻어두고 꺼내보는 타입이라 예전부터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건 젬병이었다.

이 정보가 백과사전에 오른 건 약 10년 전. 나는 현재 방년 26세에 당도했으며 여전히 목이 잘려나가는 행색은 싫지만 아주 못볼꼴은 아니다정도의 레벨에 올랐다. 수정된 건 최근, 스위트 홈을 보면서다.

사실 별로 볼 생각은 없었는데 귀는 얇디얇아 재밌다는 것들은 호기심이 발동하곤 해서 시청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던 차였다. 평은 대체로 잔인하다가 많았다. 대체 얼마나 잔인한 걸까? 사람마다 잔인함의 기준이 달라서 결국 내가 보고 판단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1화만 시청해보기로 했다.


결론은 10화까지 다 봤고 재밌었으며 잔인은 하나 내 수준에서 커버 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하나. 언제부터 청소년 관람불가를 이렇게 잘 봤지. 킹덤도 잘 봤는데. 꼬리를 물고 물다 킹스맨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킹스맨은 스무 살이 되고 처음 본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다. 정말 청소년에서 벗어나자마자 단련된 정신력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갓난아이와 다섯 살 아이가 완전히 다르듯 스무 살과 스물다섯 살도 너무 달랐다. 그때는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것조차 인생 최대의 위기로 여겼었는데 지금은 심호흡 한 번에 실행이 가능해진 것처럼 사람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도 실눈 뜨고 비명 지르면서 시청이 가능해졌다.


뭐.. 일단 나는 전화주문 전에 심호흡하는데만 세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SOS 요청 외에는 내 인생에 없을 것이다.라는 심정으로 살아왔는데 이 정보 또한 스무 살 때 수정되었다. 필요할 땐 말을 걸어야 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니까.


스무 살은 세기말처럼 혼돈스러웠다. 그저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자습을 하라고 하면 자습을 했던, 고작 몇 달 전에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능동적으로 모든 걸 해내야 했으니 당황스럽기가 그지없는 나날들이었다. 특히 교양수업 중 하나가 내가 상상했던 대학생활과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하필 과목도 사회 관련이라 몹시 진이 빠졌다. 예컨대 이런 거였다. 조를 알아서 짜세요. 그리고 토론하세요. 결론을 도출하면 발표합시다. 그게 단 십 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상황 파악하기도 바쁜데 앞줄에 앉은 범생이들은 곧잘 저들끼리 잘도 모여서 토론을 시작하더랬다. 나도 제법 앞줄이었는데 말이지. 이게 내가 상상했던 대학생활이긴 한데, 당혹스러웠다.


나는 이 교양수업으로 졸업할 때까지 팀플 구성을 할 때 협조적일 것 같은 팀원을 봐놨다가 나서서 스카웃해오는 배짱이 생겼다. 어쩌겠나, 움직이지 않으면 발표자가 출석을 했는데도 발표하러 나가지않는 사태가 발생하는 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걸. 교수는 기다려주지 않는데 말이다. 어쩌겠나, 대학의 생존법이 그러한 것을.


성장형 캐릭터.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새 그 예전의 고집처럼 단단하던 특징들이 성장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한 시간짜리 단막극 주인공도 엔딩에서는 성장을 하는데 5년, 10년이라는 러닝타임을 지나온 나는 당연히 성장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그런 행동을 하는데에는 어떤 이유나 사건이 있었기때문인 것처럼 나도 단조로워보이는 일상 속에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들이 있었을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사전에 성장형 캐릭터라는 타이틀을 달아본다. 성장판은 닫혔지만 꾸준히 변화를 겪어온 나에게 내리는 아주 특별한 배지Badge.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수한 정보와 업데이트들은 또 살면서 부지런히 해나가야겠지. 바라건대 어떻게 마무리할지 몰라 늘상—지금 현재도—아무말을 하거나 급작스러운 결말을 맺는 나의 글도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고 수정되었으면. 아무튼 앞으로가 더욱더 기대되는 주인공이다.






작가의 이전글 살인에 탁월한 조건, 無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