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시를 썼던 시기에 S빌라에 대해 ‘그 집을 떠나면서 나는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니 문장에 담긴 우울과 슬픔은 내가 성장판이 닫혔었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올림픽이 세 번 열리는 동안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집에서 머물고 잠들었으며 집은 나의 보호자였고 아무리 크게 노래를 부르고 괴짜짓을 해도 흑역사를 방출하지 못하게 해주는 보호막이었다. 물론 노랫소리는 완벽한 방음이란 없어서 학습지 선생님한테 들킨 적은 있지만. 내 살결이 묻어도 한참 묻었을 곳을 떠나야 한다는 건 달팽이 보고 하루아침에 돈키호테가 되라는 소리랑 다를 바 없다.
이유는 복합적일 수 밖에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데에도 한가지 이유만 있을 수 없듯이 S빌라는 나보다 한참 어른의 나이를 살고 있었고 겉은 새 칠을 했어도 속은 낡아빠져 수돗물에는 녹이 흘러들어왔다. 자식새끼 피부를 위협하는 데다 새집에 살아보고싶다는 욕망이 뒤섞여 일어난 화학작용은 빠르게 결정 내리는데에 크게 일조했다. 거기다 새 아파트라는데 누구라도 그리로 날아가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빠르게 새 둥지로 점찍어둔 새 아파트에 이사가기로 했다.
단정하게 네모난 방을 보고도 S빌라를 떠나고싶지 않았던 나는 매일 밤을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공책을 여러개 만들다 보니 정말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짐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그날 밤 텅 비어버린 우리 집을 다시 들렀는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남은 정리를 하기 위해서였겠지. 근데 그 텅 빈 공간이 주는 슬픔을 참느라 애먹은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더이상 우리집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났다. 현관 벽에 새겨둔 키의 흔적들, 어린 애가 방주인이었을 구름벽지.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우리 집을 낯설게 느끼는 듯 했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 집의 손님이 되어있었다.
S빌라를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었다. 새 둥지라고 해봤자 100m 달리기를 하면 도착하는 곳이었고 이후로도 세 번의 이사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S빌라를 떠날 때만큼 슬퍼하지 않았다. 무뎌졌다기보다 이삿짐이 빠지는 과정을 차단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이삿집 센터가 도착하면 그 집에 다시 발을 들이지 않는 방식이다. 그 길로 나는 새집으로 가버린다. 잔혹한 이별을 통보한 사람처럼, 총총. 그것은 S빌라가 내게 남긴 배움이자 철칙이다. 정든 집은 그렇게 끊어내듯 떠나야 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이 들므로. 우리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늘 건강하고 굳건히 버텨주길 바라며 멀리 손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