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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앵 Sep 16. 2020

S빌라전상서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시를 썼던 시기에 S빌라에 대해 ‘ 집을 떠나면서 나는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정도였으니 문장에 담긴 우울과 슬픔은 내가 성장판이 닫혔었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집에서 머물고 잠들었으며 집은 나의 보호자였고 아무리 크게 노래를 부르고 괴짜짓을 해도 흑역사를 방출하지 못하게 해주는 보호막이었다. 물론 노랫소리는 완벽한 방음이란 없어서 학습지 선생님한테 들킨 적은 있지만.  살결이 묻어도 한참 묻었을 곳을 떠나야 한다는  달팽이 보고 하루아침에 돈키호테가 되라는 소리랑 다를  없다.


이유는 복합적일 수 밖에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데에도 한가지 이유만 있을 수 없듯이 S빌라는 나보다 한참 어른의 나이를 살고 있었고 겉은 새 칠을 했어도 속은 낡아빠져 수돗물에는 녹이 흘러들어왔다. 자식새끼 피부를 위협하는 데다 새집에 살아보고싶다는 욕망이 뒤섞여 일어난 화학작용은 빠르게 결정 내리는데에 크게 일조했다. 거기다 새 아파트라는데 누구라도 그리로 날아가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빠르게 새 둥지로 점찍어둔 새 아파트에 이사가기로 했다.


단정하게 네모난 방을 보고도 S빌라를 떠나고싶지 않았던 나는 매일 밤을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공책을 여러개 만들다 보니 정말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짐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그날 밤 텅 비어버린 우리 집을 다시 들렀는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남은 정리를 하기 위해서였겠지. 근데 그 텅 빈 공간이 주는 슬픔을 참느라 애먹은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더이상 우리집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났다. 현관 벽에 새겨둔 키의 흔적들, 어린 애가 방주인이었을 구름벽지.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우리 집을 낯설게 느끼는 듯 했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 집의 손님이 되어있었다.

 

S빌라를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었다. 새 둥지라고 해봤자 100m 달리기를 하면 도착하는 곳이었고 이후로도 세 번의 이사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S빌라를 떠날 때만큼 슬퍼하지 않았다. 무뎌졌다기보다 이삿짐이 빠지는 과정을 차단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이삿집 센터가 도착하면 그 집에 다시 발을 들이지 않는 방식이다. 그 길로 나는 새집으로 가버린다. 잔혹한 이별을 통보한 사람처럼, 총총. 그것은 S빌라가 내게 남긴 배움이자 철칙이다. 정든 집은 그렇게 끊어내듯 떠나야 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이 들므로. 우리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늘 건강하고 굳건히 버텨주길 바라며 멀리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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