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자전거 여행 Knudshoved Odde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 여보세요?
- 쌤! 안녕하세요. 저 혜원이에요. 옆에 하늘이랑 같이 있어요.
- 어, 그래. 오랜만이야.
- 목소리가 왜 그래요? 주무시고 계셨어요?
- 응, 나 지금 덴마크야. 여긴 아침인데. 거긴 몇 시야?
- 정말요? 여긴 오후 5시예요. 샘! 드디어 덴마크 친구 만나러 가셨군요!
- 응, 드디어 왔어.
- 너무 좋겠어요.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 전해주세요. 저도 대학 가면 꼭 북유럽 가보고 싶어요.
- 그래, 꼭 와라. 여기 말이야, 생각한 거 이상으로 좋다. 아참! 너희들 입시 준비는 잘 돼가고 있어?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드린 거예요. 저희가 입학사정관제로 대학에 갈까 하거든요. 마침 괜찮은 공모전이 있어서 출품해 보려고 하는데 샘의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
- 그래,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그런데 나 지금 시골마을 여행 중이라 장소도 계속 바뀌고, 그러다 보니 인터넷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일단, 이메일로 자료랑 궁금한 것들 보내봐. 틈틈이 읽고 답장할게.
-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은 스노어네 마을 ‘보르딩보르’ 가장자리 끝에 있는 Knudshoved Odde이라고 하는 멋진 해변으로 자전거 여행을 가기로 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스노어는 자전거를 멈춰 세우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풍경을 가리키면서,
- 정말 멋지지 않아?
- 넌 이 동네 살잖아. 항상 보는 건데도 그렇게 멋있어?
- 응, 지난주에 너 만나러 코펜하겐에 가기 전에만 해도 이렇지 않았거든. 자연은 매일 변하잖아. 그래서 늘 새롭고 아름다워. 도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
- 혹시 네가 말하는 도시에 코펜하겐도 포함되는 거야?
- 물론이지.
- 내 눈에는 코펜하겐도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인데.
- 방금 네가 말했듯이 코펜하겐도 결국 ‘도시’잖아.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라도 도시는 도시인 거지. 건물들만 빼곡히 있는 코펜하겐에 오래 머물면 나는 곧 답답함을 느껴.
- 네가 왜 서울을 싫어하는지 이제 알겠다.
- 내가 다시 한국에 간다면 나는 무조건 경주지. 여기 경주랑 많이 닮았지?
한참을 더 달려 들른 곳은 어느 무덤이었다.
- 지금 이 지역이 예전에 바이킹이 살던 곳이거든. 여기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유물도 발굴되었어. 근데 이 무덤 말이야, 경주에 있는 것들하고 비슷하게 생겼지?
- 그러네, 정말 신기하다.
- 한 번 들어가 볼래?
- 들어가도 돼?
- 응, 어렸을 때, 들어가 봤었어.
- 들어가면 뭐 있는데?
- 기어 들어가다 보면 좌우로 통로가 있고 방이 있어. 너 전화기에 라이트 있지? 들어가 봐.
- 와! 신기하네, 그래도 좀... 음… 벌레도 있을까? 진드기 같은?
- 어쩌면 있을 수도
- 그럼 안 들어갈래.
(잠시 후)
- 내 머릿속에는 바이킹 하면 떠오르는 게 '약탈', '침략' 뭐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데. 덴마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 그래? 그거 참 흥미롭네.
- 흥미롭다니? 그럼 사실이 아니야?
- 약탈, 침략… 뭐, 있었겠지. 하지만 거기 어디더라? 팩죄 쉴라 말고 코쿠... 뭐더라, 알았었는데.
- 너 설마 고구려 말하려는 거야?
- 아! 맞다 코쿠려! 자꾸 까먹네 히히. 근데 고구려도 약탈, 살인 안 했겠어? 영토 확장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침략인 거잖아. 어쩌면 그동안 너는 바이킹을 덴마크의 시각이 아닌 외부의 시각에서 보아왔을지도.
- 그럴 수도 있겠네. 그건 그렇고 네 입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우린 다시 땅끝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길이 좁아지더니 결국 비포장도로, 그다음에는 자갈길이 나왔다. 내 자전거 타이어는 포장도로용이라서 이런 길에는 취약하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조건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렸다. 여분의 타이어를 준비할 생각은 전혀 안 했었다. 타이어가 터지면 어쩌지 생각해 보니 아찔했다. 왔던 길을 타이어 터진 자전거를 끌고 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자꾸만 상상하면서, 타이어만 쳐다보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짜증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 멋진 풍경을 앞에다 두고 아직 터지지도 않은 타이어 걱정이라니. 걱정 많은 성격은 여기서도 속을 썩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야단을 쳤다.
“걱정하면 터질 타이어가 안 터지냐! 여행은 무서워서 어떻게 다니냐! 고작 타이어 터지는 게 그렇게 걱정되는데 비행기 터지는 건 안 무섭냐!”
“그래! 타이어 터지면 그때 생각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즐기자”라고 다짐했다.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자갈길이 끝나니 모래밭이 펼쳐졌다. 천천히 달리면 타이어가 모래에 더 깊이 빠지기 때문에 더 힘들다. 그래서 더욱 힘차게 페달질을 해서 이 구간을 빠르게 지나가야 했다. 뭐, 타이어가 터지진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대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모래밭을 지나니 이제 풀밭이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생각하며 여유롭게 라이딩을 즐겼다. 주변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으며 한참을 달리는데 발목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풀에 다리가 쓸린 듯했다. 내가 겪은 것에 비해 사진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롭다. 하긴, 남는 건 사진이고 쓰라린 고통은 잠시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타이어는 터지지 않았고 그 걱정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풀밭을 한참 지나 스노어가 수영을 하겠다며 옷을 벗는데, 이 녀석 훌러덩 나체의 몸으로 물에 들어갔다. 나는 집에 돌아갈 체력을 남겨놓아야 하기에 그냥 앉아서 쉬겠다고 했다.
전화기를 보니 아침에 통화했던 혜원이한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내용인즉슨 DMZ의 생태 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해서 UCC를 만들겠다는 거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가장 좋은 생태 환경 보호의 본보기가 아닌가! 인공구조물 하나 없이 자연 그대로다. 아까 오는 길에 '캠핑 금지'라는 표지판까지 봤다. 아침에 스노어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가방에 넣었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우리가 지나왔던 길 중간중간에 편의점과 식당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타이어 터질 걱정 없는 포장도로가 깔려 있을 테고. 사람들은 편하게 저 땅끝까지 차로 이동할 터이다. 그곳엔 넓은 주차장과 나무 데크가 깔린 전망대, 그리고 매점과 화장실이 있겠지.
수영을 마친 스노어가 가방에서 1.5L짜리 물통을 꺼낸다. 저 무거운 걸 가지고 오다니.
- 아침에 네가 부엌에서 준비하는 걸 보긴 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미안해. 이젠부터는 내 가방에 넣을게.
- 괜찮아 브라더. 넌 손님이잖아.
그러더니 가방에서 빵, 오이, 잼까지 꺼내더니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나중에 가방에서 멜론이 나올 때는 순간 울컥했다. 멜론이라니.
또다시 한참을 달려 땅 끝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눈앞에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 옆으로는 마치 뜯어진 베개커버에서 빠져나온 하얀 솜 같은 것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점점점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백조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동물의 사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생을 다 한 백조한테서 빠진 깃털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스노어는 놀란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Life and 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