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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 Oct 13. 2022

교토가 그리우면 노트를 꺼내

자코모, 니키 그리고 나 (2)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새 여행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잊히기 시작한다. 마치 잠에서 깨자마자 빠르게 꿈이 사라지듯이. 쇼핑을 즐기는 것도 아니어서 오래 기억될 만한 물건들도 없다. 자석도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만 알려줄 뿐 그 이상의 것들은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그 지역 문구점에 들어가서 그 지역과 잘 어울리는 노트를 구입한다. 그리고 여행 내내 경험했던 일들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책꽂이에 잘 두었다가 가끔씩 꺼내 읽어보면 머릿속 깊은 곳에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날도 호숫가에서 잠시 쉬면서 오늘 하루 자코모와 니키랑 나눈 이야기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이들을 만난 지 단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들과 함께 나눈 즐거운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최대한 디테일하게 적었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적어도 끝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적다가 옆을 돌아보니 자코모도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 - 너도 여행노트 쓰는 거야?

자코모 - 응, 너도?

니키 - 너희들, 참 많은 것들이 닮았다.

자코모 - 나에 대해서도 적었어?

나 - 응.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온 한국영화를 좋아하고 명상하는 채식주의자 드러머. 어때? 요약 잘했지! 너도 나에 대해서 적었어?

자코모 - 응. 한국에서 본인 자전거를 가지고 여행 온 채식하고 명상하는 정말 젊은 얼굴을 가진 엄청 나이 많은 남자.

나 - 와! 정말, 웃긴다.

니키 - 너 몇 살인데?

나 - 38살

니키 - 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얼굴이 38살이야?

나 - 호주에도 동양 사람들 많잖아. 너 동양인 친구 없어?

니키 - 하긴, 동양 사람들이 좀 어려 보이긴 하지. 나는 네가 내 또래인 줄 알았어.


하마터면 "나도 같은 생각 했는데"라고 말해버릴 뻔했는데 정말 잘 참았다.


나 - 너는 몇 살인데?

니키 - 22살

나 - 뭐???!!! (아차! 대놓고 너무 놀라버렸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니키 - 왜? 내가 너무 늙어 보여?

나 - 아니야,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

니키 - 아무래도 못 믿겠어. 너 신분증 있어?

자코모 - 그만해, 아까 나도 너무 이상해서 확인해봤어. 쟤 38살 맞아.

니키 - (결국, 내 신분증을 보더니) 도대체, 동양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어려 보이는 거야?

그렇게 또 한참을 수다 떨다가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낚시하는 거 구경하다가 해가 저버렸다.


- 자코모 - 야, 우리 이제 가자.

- 니키 - 좀 아쉽다.

- 나 - 그러면 기차역 가는 길에 대나무 숲 있는데 들렀다 갈래? 아까 자코모랑 거기서 만났는데 굉장히 멋진 곳이야.

- 니키 - 그래 가보자

우리는 조명 없는 밤길을 지나 대나무 숲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사람이 없고 깜깜한 대나무 숲은 굉장히 무서웠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뒤돌아 나와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까 낮에 건넜던 다리 위에서 보니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손님들을 나룻배에 태운 뒤 강 한가운데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강 여기저기에서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건저 올리나 보다 했는데 잠시 후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던 니키와 자코모가 나에게 오더니,


- 자코모 - 너무 끔찍하지?

- 나 - 끔찍하다니 뭐가?

- 자코모 - 저거 말이야.

- 나 - 저게 왜?


뭔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물 안에 있는 건 십 수 마리의 오리였다. 거친 날갯짓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강 주위를 온통 휘감고 있는 소리가 저 오리들에게서 나오는 비명소리였다. 그런데, 그물에 있는 게 물고기라고 생각했을 때와 오리인 것을 확인했을 때의 느낌은 왜 다른 걸까? 왜 물고기는 괜찮고 오리는 불쌍하다고 느끼는 걸까?


니키 - 이제 봤구나?

나 - 큐브가 생각나네. 너 그거 봤어?

자코모 - 그게 뭔데?

니키 - 나는 봤어. 돌고래에 관한 다큐인데. 일본에 어느 어촌 마을 해안가에서 어부들이 돌고래들을 가둬놓고, 좋은 건 동물원에 서커스용으로 팔고 나머지는 식용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즉석에서 죽여. 그런데 그 과정이 상당히 잔인했어. 해안가가 온통 피로 물들고.

자코모 - 한국 사람들 요즘도 개고기 먹어?

나 - 응.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개고기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 꽤 있었는데,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어. 하지만 아직 존재해. 식용으로 사용할 개를 거래하는 시장도 아직 있고.

니키 - 너도 먹어봤어?

나 - 응, 어렸을 때. 어느 날 엄마랑 시장에 갔는데, 여러 개의 케이지들 안에 개들이 있었어. 그중에 한 마리를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가게 주인은 그 개를 꺼내서 엄마와 함께 가게 뒤편으로 갔지. 엄마가 보는 앞에서 도축을 한 거야.

니키 - 너는?

나 - 나는 밖에서 기다렸어.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개고기를 먹었지.

자코모 - 사실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런 거 꽤 많이 먹어.

니키 - 옛날에 외할머니가 값비싼 회를 사주신 적이 있었는데. 생선은 껍질이 벗겨지고 회가 이미 떠진 상태인데 움직이더라고. 물론 그것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긴 했어.


우리의 수다는 각 나라의 음식문화, 정치, 후쿠시마 방사능 사고, 채식을 하게 된 계기, 연애와 결혼, 직업... 끝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역에 도착했다.

나 - 우리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 해. 자전거 커버가 없어서 나는 기차 못 타. 나는 여기서 숙소까지 자전거 타고 갈게. 내일 한국으로 가는 것만 아니면 내일도 같이 만나서 여행하면 좋을 텐데.

니키 - 한국은 가까우니까 또 볼 수 있겠지? 내가 좋은 곳 많이 알아 놓을테니 우리 또 만나자.

자코모 - 나는 내년에 대학교 졸업하면 일본에 다시 와서 좀 오래 머물고 싶어. 한국에도 가보고 싶어. 그때 우리 다시 만나자.

나 - 그래.

니키 - 오늘 너무 즐거웠어.


자코모와 니키는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나는 심야 라이딩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가방에 자코모의 헤드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페이스북 메시지로 이 사실을 알리고 라면을 먹으며 답장을 기다렸다. 다행히 곧 답장이 왔고, 나는 다시 자코모와 니키가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다행히 나의 숙소와 가까웠고, 덕분에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 심야 자전거 라이딩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우린 이렇게 또 만나 수다 떨고 나의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을 함께 아쉬워했다.


니키 : 네 숙소로 돌아갈 때, 저기 뒷길로 가봐. 자전거 타기 좋을 것 같아. 길이 예쁘더라고.

나 : 그래, 알았어.

아무도 없는 교토 뒷골목에서 밤바람, 벌레소리, 시골냄새를 가득 기억에 담았다.


자코모와 니키를 다시 만나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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