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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편 Dec 10. 2020

아기가 운다

아이와 함께 D+30, 적당히 익숙해 지기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아내와 나 단 둘이서 아이를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숙한데 이제 알아서 해야 된다는 부감감이 들었다.


아이가 울면 마냥 안아 줘야 하나? 그러면 아이가 손탄다는데?

수면 교육을 위해서라도 울면서 침대에 눕혀야 하나? 어떤 책은 신생아 시절부터 바로, 다른 영상에서는 50일, 친구들 한테 듣기에는 100일까지 수면 교육은 무리라는데?

너무 어린데 아기띠는 해도 되나? 아기띠만 하면 너무 잘 자는데, 내려놓기만 하면 깨네, 어떻게 해야 하지?

분유, 모유, 혼합?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모유만으로 양이 부족한 것 같은데 분유를 같이 먹으면 자꾸 소화를 못 시키는 것 같다.

울음을 구분해야 된다는데 하나도 구분이 안 가는데 어떻게 하지?



내가 이렇게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될 만큼 내 안에 많은 물음표들이 생긴다. 이런 고민들이 드는 이유는 아기가 정말 쉴 새 없이 울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다고 울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 울고,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울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울고, 그냥 침대에 눕혔다고 운다.

이렇게 울면 아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다. 목이 쉬도록 운다. 아래층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이쁘더라는(?) 말씀을 해주실 정도로 운다.


너무나 많은 울음이 있고 아이의 세계에서는 울음이 아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이지만, 그 모든 울음에 부모는 마음이 흔들린다. 마치 아이의 울음소리는 부모의 마음을 찢는 언어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마냥 진정되지 않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면서, 부모는 슬프고, 무력감을 느끼고, 졸리고, 때로는 화가 난다. 울음이라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아기에게 부모는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된다.


“잘 때가 가장 이뻐”라는 말은 아기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라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왜냐면 아이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도 부모는 아기의 표정을 찾고 이쁨을 찾고 귀여움을 찾아낸다. 울지만 않으면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그 모든 기쁨은 모두 초기화가 되니 겪으면서도 참 신기한 일이다.


여러 강의와 서적들은 아기의 울음이 의사소통이라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란다. 반응해줘야 하지만 큰일이 난 것처럼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듣고 보아서 알지만 초보 부모에게 울음에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아예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 떨지도 않는 그 적당함. 모두 동일한 언어인 것 같은 아기의 울음을 해석하는 것은 처음 프랑스어를 접했을 때보다도 당황스럽다.


결국은 관심과 시간이 답이다. 그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이 우는 이유가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두려운 확신을 가지며 부모는 그렇게 적당히 아기의 울음에 익숙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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