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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20. 2022

희망은
브레멘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루리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루리, 비룡소(2020).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는 그림책을 읽을 때에는 소설책과는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말한다. 그림책에서 그림은 글의 내용을 부연하는 역할이 아니라, 글자와 동등하게 서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그림책에서는 글자와 그림이 서로를 보완하며 의미를 풍부하게 담아낸다. 때로는 글자 없이 그림만으로도 오롯한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루리 작가의 등단작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않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림의 조화, 그리고 그림을 활용하는 독특한 방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 26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했다.


네 마리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나이가 너무 많다며 택시 운전석에서 밀려난 당나귀, 일하던 식당이 이전하며 일을 할 수 없게 된 바둑이, 인상이 사납다며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야옹이, 지하철 역사 내에서 두부를 팔다 쫓겨난 꼬꼬댁이다. 일자리를 잃은 네 동물들은 초라한 짐을 들고서 퇴근길 지하철에 올라탄다. 노을 지던 하늘이 아주 깜깜해질 때까지 지하철을 타고, 언덕과 계단을 힘겹게 오른 끝에 그들은 작은 집에 도착한다. 집 안에는 자신은 멍청하고 늙어서 더 이상 나쁜 일도 할 수 없다며 한탄하는 네 명의 도둑들이 있다. 열심히 살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도둑들 앞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네 동물들이 나타난다. 동물들과 도둑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탄식한다. 열심히 살아도 소용이 없다니, “그럼 우리는 이제 뭐 하지?”


사람의 마음이 꺾이고 삶이 무너져도 허기는 야속하게 찾아온다. “일단 밥이나 먹을까요?” 이들은 몇 안 되는 살림살이와 각자의 마지막 음식을 모아 김치찌개를 끓여 나눠먹는다. 따뜻한 밥과 국물을 삼키고 나니, 막막한 삶에 ‘만약에’라는 말을 덧붙여볼 수 있는 실낱같은 힘이 생긴다. 만약에,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단어 뒤로 말없이 그림들이 이어진다. 낡은 집에 ‘오늘도 멋찌개’ 간판을 올리고, 힘을 합쳐 김치찌개를 팔고, 손님들이 찾아온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다, 만약일 뿐이지만.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않았다』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앞뒤 면지에 덧붙여진 그림이 있기에 이 ‘만약에’는 맥없는 가정이나 상투적인 후회를 넘어 희망의 언어로 탈바꿈한다. 그 어떤 구체적인 설명보다도 한 마디의 문장이, 한 장의 그림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할 때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앞면지에서 네 동물과 네 도둑은 회색빛 도시를 힘없이 배회하고 있다. 뒷면지에서는 식당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물들과 도둑들의 모습이 활기차게 그려진다. 앞뒤 면지의 그림은 글자의 서사에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부여하며 이야기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낸다. 


‘만약에’라는 말과 함께 꺼내놓았던 장면들은 아직 상상에 불과하다. 식당이 무탈하게 개업할 수 있을지, 손님들이 과연 찾아올지, 친구들끼리 다투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찌개의 온기와 함께 무럭무럭 부풀어 오른 희망은 뒷면지를 지나 책을 덮고 나서도 유효하다. 이 순간의 희망을 기억하고 있다면 훗날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어렵지 않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려운 현실을 보듬는 다정한 시선과 따스한 희망, 그림 곳곳에서 느껴지는 재치가 산뜻하게 어우러진다. 폭넓은 연령층의 독자들이 이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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