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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11. 2022

도발적인 질문과 견고한 논리로 빚어낸 섬뜩한 SF 세계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허블(2022).

김초엽 소설가는 이 책의 추천사를 이렇게 썼다. “장담컨대, 일단 펼쳐 들면 끝까지 놓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무척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 추천사 뒤에 이런 당부를 덧붙이고 싶다. ‘일단 펼쳐 들’ 때 꼭 책의 맨 처음부터 읽으라고. 《내가 행복한 이유》는 세계적인 SF작가 그렉 이건의 중단편 11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그렉 이건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가지각색의 작품들 중에서도 첫 번째 수록작인 <적절한 사랑>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 이름도 낯설고 어려워 보이는 ‘하드 SF’의 세계와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 앞에 망설이는 독자가 있다면, <적절한 사랑>은 독자를 단숨에 그렉 이건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황상훈 번역가는 그렉 이건의 작품 세계를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유전공학·뇌과학·컴퓨터과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한 인문학적 SF, 우주의 구조를 탐구하는 수학 SF, 블랙홀과 멀티버스 등을 다루는 물리학 SF, 불사를 획득한 인간의 미래를 다룬 SF 등이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이 4가지 유형의 작품이 골고루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수록작 <적절한 사랑>은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작품으로 그렉 이건 특유의 무시무시하리만치 도발적인 상상력과, 정교하되 과감하고 신랄한 문장이 돋보인다. 큰 사고를 당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남편의 뇌를 무려 2년간 자궁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끔찍한 상황을 세심한 심리 묘사를 곁들여 설득력 있게 풀어내며, 생명윤리는 물론이고 성의 정치와 생화학적 사랑에 대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적절한 사랑>처럼 강렬한 작품이 앞에 위치해있는데도, 뒤에 수록된 10개의 작품은 고유한 개성이 퇴색되는 일 없이 매력적인 이야기와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루미너스>는 ‘수학의 정의에 모순이 있다면?’이라는 철학적 가정을 액션·추적 스릴러라는 틀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실버파이어>는 전염병 ‘실버파이어’의 전파 과정을 추적하는 전개를 통해 오늘날 코로나19를 연상시키는 한편 비이성적인 것을 좇는 인간 본성이 만들어내는 폐해를 섬뜩하게 그려낸다.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는 ‘에이즈는 신이 내린 천벌’이라 주장하는 맹목적 종교인들을 신랄하게 비꼬고, <체르노빌의 성모>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종교성’을 VR 기술을 소재로 탐구한다.


그렉 이건은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사실적인’ 하드SF 분야의 작가로 손꼽힌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서술이 아주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그의 등장인물은 종종 고유한 개성이나 성격을 가진 사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고실험을 완성하기 위한 매개체처럼 느껴진다. 등장인물에게 친근함과 매력을 느끼기에는 다소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추리, 추격, 범죄,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작품 안에서 결합하며 이야기를 스릴 있게 이끌어가는 동시에 흡입력 있는 감정 묘사,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통찰을 아우르는 뛰어난 솜씨는 그렉 이건이 왜 ‘SF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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