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12. 2022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 조한진희 외,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돌봄이 돌보는 세계>, 조한진희 외, 동아시아(2022).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몇 년 전은 눈앞이 번쩍번쩍한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내 주위에는 어린이집이나 학교를 다니는 어린 아이도,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머무는 환자도 없었다. 가까이 있지 않으니 평소에는 미처 생각할 기회가 없었던 존재들이 뉴스 속에서 돌연 존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자주 접하지 못했던 것은 비단 내가 놓여있는 환경 탓만은 아니었다. 장애는, 시설은, 간호는, 아이들은, 그리고 돌봄은 코로나19 이전부터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고 격리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애를 가진 몸은, 요양시설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은, 병환으로 몸져누운 환자와 동네를 뛰어다니며 소리지르는 아이들은 어느 순간 비일상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이들을 ‘볼 수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은 어쩌면 아이를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를) 내 업장 안으로 들여놓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노키즈존과도 비슷한 힘의 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정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들어오지 말라는 엄포.


코로나19와 관련해 이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때로는 그 취약성으로 인해 빚어진 안타까운 소식을 전달하던 뉴스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잠깐이나마 보이게 했다. 스쳐지나가는 자막과 일이 분 간의 뉴스 영상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그 보이지 않는 돌봄의 세계를, 《돌봄이 돌보는 세계》는 정성들여 가지런히 펼쳐놓는다. 신체·정신장애와 보육교사·요양보호사 등 돌봄이 필요한 개인의 삶부터 돌봄이 필요한 교육·의료 현장,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 더 나아가 전 지구적 차원의 동참이 요구되는 돌봄에 기반한 탈성장 논의를 열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전달한다.


이 책의 필진은 해당 분야의 교수이거나 전문 연구원이기도 하고, 관련 사회운동에 꾸준히 헌신해온 운동가이거나 돌봄 문제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돌봄 문제를 고민하고 천착해온 이들이 명징한 언어와 오해의 소지 없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할 때, 차분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돋을새김이라도 된 것처럼 또렷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상황에 대한 분노도 실망도 억울함도 한탄도 지나간 곳에는 ‘돌봄’을 향하고자 하는 단정하고 단단한 힘만이 남는다.


조한진희 활동가의 글에는 이런 경험담이 등장한다. 2022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필자에게 기자는 이것이 실현 가능한 이야기냐고 묻는다. 조한진희 활동가는 그날의 질의응답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지만, 당위만으로 사회가 바뀌지 읺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위 없이, 이상 없이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벗어나 애정과 애착 없이도 기능하는 돌봄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거나, 성장 위주의 세계관을 포기해야한다는 주장은 실현 불가능해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활동가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돌봄과 탈성장을 둘러싼 담화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실현가능성을 칼같이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미래를 꿈꾸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일 테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는 그 자체로 ‘왜 성장 대신 돌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되는 책이다.


우리가 돌봄 중심의 사회를 꿈꾸어야 하는 이유는 나도 언젠가 돌봄이 필요한 약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도, 약자와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동정과 연민의 목소리 대문도 아니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베풀어지는 본능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재화도 아니다. 돌봄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 ‘잘 돌보는’ 또는 ‘잘 돌봄 받는’ 삶은 곧 ‘잘 사는 삶’으로 이어진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는 우리 함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해보자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떠한 질서가 새롭게 필요할지 고민해보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발적인 질문과 견고한 논리로 빚어낸 섬뜩한 SF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