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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27. 2022

전쟁이 만든 약, 미래를 만들 약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백승만,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백승만, 동아시아(2022).

백승만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의약품의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인 동시에, 의약품을 개발하는 연구원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만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의약품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고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약품 계발의 계기나 과정을 전쟁, 전염병 등 세계 주요 사건들과 연관지어 흥미진진하게 서술하는 재치와 더불어, 신뢰감을 더하는 진중하고 엄밀한 태도가 돋보인다.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는 의약품을 중심으로 풀어낸 전쟁사 책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대부터 시작해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9·11 테러, 최근 있었던 알렉세이 나발니 중독 사건까지 폭넓은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역사책이나 뉴스 속 사건들은 과학책 속 과학자들, 그리고 약국 속 약품들의 이름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의약품들은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페닌실린을 발견했다'는 단조로운 한 문장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상황 설명과 의약품 개발 과정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인 설명이 더해져 더 매력적이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로 거듭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합물과 씨름하는 과학자들의 여정은 곧잘 전쟁이나 우연이 빚어낸 영화처럼 보이지만, 꾸준한 도전과 치밀한 준비로 만들어지는 노력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페니실린의 등장은 흡사 영화를 방불케한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한 페니실린은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혔다. 그러나 몇 년 후 감염증 치료에 대해 자료를 찾던 알렉산더 플레밍의 눈에 띄어, 그 효과를 더 명확하게 증명하게 된다. 페니실린의 효능은 분명해졌지만 당시 치열한 전쟁 속이던 영국에서는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생산할 수 없었다. 준비한 페니실린이 모자라 치료하던 환자가 사망하고, 플로리는 동료 히틀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거대 제약회사의 도움을 받는다. 화이자(화이자 백신의 그 화이자가 맞다)와 릴리, 머크 등 다양한 제약회사와 협업하고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끝에 페니실린은 불과 3년만에 상용화된다. 페니실린은 미군의 파리 수복전에서 톡톡히 역할을 해냈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과 더불어 최근의 에이즈 치료제, 오늘날 코로나 백신을 빠른 속도로 개발할 수 있게 한 mRNA 백신 기술 등은 모두 인간의 치밀한 준비로 만들어진 공로임을 덧붙인다.


대중 인문교양서에서는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썼는지'가 중요하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저자가 주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분위기로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지'라고 생각한다. 백승만 교수의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있어서 훌륭한 책이다.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 억지스럽거나 과장스러운 태도로 접근하는 대신 내용의 질과 구성으로 흥미를 높이고 있으며, 전쟁의 폐해와 약물 오남용의 위험성을 본문 내에서 몇 번이고 언급하는 진중함이 돋보인다. 


책의 본문은 생물학무기로 인한 참담한 피해를 묘사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저자는 최근의 의약품적 성과를 이야기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의약품은 분명 전쟁을 겪으며 빠르게 개발되고 개선되었으나 꼭 전쟁이 있어야만 괄목할만 한 발전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전쟁의 급박함이나 영화 같은 우연에 기대지 않고서도, 인간의 부단한 노력과 세심한 준비로 의학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의약품을 개발하며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당사자인 저자의 글에서는 단단한 희망의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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