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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07. 2023

섬세하고 대범한 상상력으로 채색한
일제강점기 모티프SF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조호근 역, 허블(2023).

《나인폭스 갬빗》으로 휴고상에 3연속 노미네이트된 작가, 이윤하가 신작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로 돌아왔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한 SF소설이다. 이윤하 작가는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오며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 그리고 특유의 섬세하고도 대범한 상상력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그려냈다.


'제비'의 고국 화국은 6년 전 이웃국가 라잔에게 점령당했다. 언니 '봉숭아'와 단둘이 단출하게 생활하던 제비는 생계를 위해 라잔의 예술성에서 화가로 일하고자 한다. 그러나 라잔과의 전쟁에서 아내를 잃은 봉숭아는 제비의 선택을 강경하게 반대한다. 제비는 집에서 쫓겨나고, 설상가상으로 예술성의 시험에서도 떨어진다. 방황하던 제비는 라잔의 방위성 장관 대리 '하판덴'의 협박으로, 라잔의 전쟁병기인 자동인형 '아라지'를 만드는 일에 동원된다. 라잔 제일의 결투가인 '베이'가 제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도망칠 수조차 없다. 제비는 고국의 예술품을 파괴하고 라잔을 도와아하는 자신의 임무와, 언니의 아내를 죽인 원수 베이에게 이끌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한다.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을 살펴볼 때면 재현과 창작의 윤리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사람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사건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역사는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틀이 될 수도 있고, 작가의 윤리와 상상력을 시험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이윤하 작가는 일제강점기라는 모티프를 화국과 라잔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통해 영리하게 풀어내며, 한국을 향한 깊은 애정과 특유의 섬세한 상상력을 톡톡히 보여준다. 작중에 세세하게 묘사되는 화국과 라잔의 언어, 고유명사, 생활상 속에서 일제강점기라는 모티프는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하고 강력해진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와 섬세한 관계성은 이야기에 박진감과 몰입감을 불어넣는다.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다. 제비와 언니 봉숭아는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각자의 뜻을 굽히지는 않는다. 제비는 언니 봉숭아를 지극히 사랑하고 라잔과 맞서 싸울 능력 또한 갖추고 있지만, 그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아한다. 봉숭아는 화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동생 제비마저 이용하려고 한다. 오랜 친구가 라잔을 위해 부역하는 모습에 심란해하고, 결국 화국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친구를 애도하는 제비의 모습은 인간적이다. 전쟁병기 아라지를 라잔을 향해 사용하고 싶어할만큼 라잔을 미워하면서도, 라잔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봉숭아의 모습에서는 복수와 증오심보다 앞서는 인간의 도리와 예의가 보인다. 인물을 단순하게 선과 악, 아군과 적군으로 가르지 않고 저마다 고유한 신념과 정의를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이윤하 작가의 서술 덕분에 독자는 이야기속에서 분노와 아픔, 복수심, 통쾌함보다 먼저 단단한 사랑을 받아들게 된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피식민지의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서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섬세하며, 용, 달, 부적 등 동양적인 요소를 SF와 판타지에 절묘하게 혼합했다는 점에서 과감하게 능숙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대한 은유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한국적 묘사들은 한국인 독자에게 더 특별하고 값진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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