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71주년 기념 음악회 '평화 콘서트'
6월은 음악당 라인업이 기근인 데다가 내 취향과 정확히 빗나가는 프로그램들만 나와 중순부터는 오페라하우스만 가겠구나 생각했다. 예당 달력에서 제목만 보기 전까진 이 공연도 흔하디 흔한 전석 초대 음악회인 줄 알았다. 그러다 뭐 하는지나 보자 하고 상세보기를 눌렀다가 뜨악을 외쳤다. 출연진 목록에 여마에님이 올라와 이거 안 오면 미래의 네가 후회할 거야라고 유혹하고 있었다ㄷㄷ 게다가 티켓팅은 당장 내일모레.... 바로 추가합격통보받은 수험생처럼 발레축제 공연은 다음날로 날짜 바꾸고 티켓팅을 준비했다.(그리고 발레축제 공연 날짜를 바꾼 덕에 운수 좋은 날이 되었다.)
일반회원 티켓팅 날이 되자 경건한 마음으로 네이비즘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예매를 클릭했더니 아니 왜 찐팬들의 지정석 1-2열이 두부 밭이 된 거야... 유료회원들이 먼저 가져간 거야? 아니면 초대석으로 다 빠진 거야? 하며 그나마 남은 c블록 3열 자리를 업어갔다.
이번 공연은 분위기가 분위기이니만큼 옷차림도 신경을 썼다. 너무 화려하거나 편하게 입고 가면 결례일 것 같아 처음에는 정장 바지를 오랜만에 꺼내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6월 한낮의 불가마 더위를 온몸으로 체험해 몸에 땀띠가 나 정장 바지는커녕 긴 바지도 무리였다ㅠ 결국 7부 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나라에서 직접 기획한 음악회라 혹시 대통령님이 뜨지 않을까 기대를 살짝 했지만 그런 거 없었다. 대신 국가보훈처 높으신 분들과 각 나라 대사들이 왔지만 유명인 알아보기 능력시험 9등급 보유자에겐 높으신 분 1인일 뿐이었다;;
참고로 예당에 대통령님이나 영부인님이 뜨면 공항처럼 입구부터 x레이로 짐 검사하고 음료 가지고 있으면 마셔보라고 할 정도로 절차가 깐깐해지니 쉽게 알 수 있다.
7시 땡 하고 자리에 앉았더니 웬일이니 명당이었다. 요즘은 살짝 안 쓰고 있는 관악기용 투명 가림판을 쓸 정도로 방역에 신경을 많이 써서 1-2열은 아예 관객을 안 받은 좌석배치였다. 그러다 보니 찐팬들이 죄다 3-4열에 몰려 앉아 관크 청정구역이 된 건 안비밀이다. 정부와 대사관 높으신 분들이 많이 와 하느님 부처님 공연 중에 벨소리 안 울리게 해 주세요 옆자리에 코골이 무단 협연 안 나오게 해 주세요 빌었는데 그 흔한 안다 박수도 안 나왔다ㄷㄷ
보너스로 이번 자리는 예당의 명물(?) 브라보 아저씨의 옆 옆 옆자리였다. 그분이 브라보를 외치지 않는 공연은 진짜로 망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흥행 판독기 역할을 톡톡히 하시는 유명인사시다.
드디어 단원들이 입장한다. 역시 이번에도 홀로 느끼는 내적 친밀감.... 플루트 수석님과 바이올린 수석님, 오보에 클라리넷 단원님은 언제 봐도 반갑다. 인상이 비슷해서 처음에는 쌍둥이인 줄 알았던 오보에&클라 단원님들은 더 반갑다. (강남심포니 고정 관객들은 누군지 다 아실 듯) 이런 기념음악회는 설샹이나 k향만 하는 줄 알았는데 강남심포니가 맡아 신기했다. 내 입장에서는 왕이득이다.
첫 곡은 태극기 휘날리던 영화의 ost였다. 영화와는 친하지 않아 제목만 듣곤 뭥미를 외쳤는데 첫 소절을 들으니 아니 이 곡이 그 곡이었어?!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곡이었다. 주로 감동적인 장면이나 험난한 과정 끝에 미션을 성공하는 상황에서 많이 써 예능 시청자에게도 익숙했다.
스선생님은 중고딩시절 음악시간에 기말고사로 이 내용은 꼭 낸다며 찝어 주시던 국민악파 대표 작곡가다. 몇몇 학교는 감상 수행평가로도 출제해 나의 조국은 클알못도 제목과 멜로디를 일치시킬 수 있는 레어 음악이다. 최고 인기곡인 4악장은 다들 몰다우인 줄 알고 플북에도 몰다우로 쓰여 있지만 나는 블타바로 부르고 싶다. 몰다우는 체코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식 명칭이라 스선생님이 관속에서 슬퍼하실지도 모른다.
무디의 톨레도-스페인 환상곡은 이제까지 못 들어본 하모니카 협주곡이라 뭥미를 외쳤는데 웬걸 이 곡도 겁나 좋군이다. 유딩때 불어댔던 하모니카는 하모니카가 아니었어.... 카덴차가 나오면 내가 연주하지도 않는데 온몸에 긴장이 첨가된다. 모 클래식 음악 커뮤니티에서 최악의 관크를 뽑는 글에 카덴차 연주 중 벨소리 테러가 있던 게 기억 나 제발 벨소리 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공연신이 보우하셔 모아이 모드로 무사히 곡이 끝났다.
새야 새야는 중딩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새야 새야 파랑새야 희곡을 떠올리게 했다. 동학 농민운동을 함께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변절해 떵떵거리며 사는 오세정에게 여전히 소신을 지키며 근근이 먹고사는 기천석이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얻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부분이 국어책에 실려서다. 그 후 원한을 품은 기천석의 아들이 오세정의 생파에 쳐들어가 그를 살해하자 기천석이 살인교사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줄거리다.
1부 마지막은 엘선생님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다. 원래는 절친에게 헌정했던 그저 그런 곡이었지만 타이타닉 희생자 추모 음악회에 나온 이후로 클래식 음악의 대표 추모곡으로 자리매김하는 작품이다. 공연 포스터에 내 최애 1호님의 사진들을 찍어주셨던 현 작가님이 나왔길래 로비에서 사진 전시하는구나 생각했는데 합창석 너머 스크린으로 영상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현 작가님은 참전용사님들의 사진과 영상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와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울면 마스크 버린다고 눈물 참기에 열중했더니 정작 님로드는 제대로 못 들었다.
1부는 추모 분위기였다면 2부는 전쟁과 코시국을 딛고 힘차게 나아가자는 희망을 그렸다. 윌리엄 텔 서곡이라고 적혀있길래 여러 곡 짧게 하는 기념 음악회답게 맥날 3000 원송 부분만 하겠지 싶었는데 경기도 오산이었다;;
그래도 초딩학교 음악시간 이후 들을 일이 없었던 2부 폭풍우와 3부 고요함까지 보너스로 들었다. 너튜브로만 들을 땐 몰랐지만 현악기와 타악기는 덕후의 가슴에 폭풍우를 뿌려주고 3부 플루트 솔로에서는 피치카토들이 멜로디를 받쳐주고 있었다.
맥날 3000 원송과 동서양 잔소리 송은 4부 스위스 군대의 행진이다. 귀 뒤도 씻었냐 네 친구들이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거냐는 서양 엄마들의 잔소리를 들으면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윌리엄 텔 서곡이 끝나자 동화책에서 여신님이 걸어 나오셨다. 피터팬 아리아도 그날도 모두 지금 상황과 너무 찰떡같은 가사라 잠시 천국에 있다 온 느낌이다. 특히 그날은 올해 신년음악회에도 나온 곡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만 해도 신년 시즌 특별방역과 절망적인 코시국 분위기 때문에 무관중 온라인 연주회가 되었지만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식당에서 마음 놓고 밥 먹고 공연 두 탕씩 뛸 수 있는 날이 곧 오겠지.
원래는 김기훈 바리톤님이 나오기로 했지만 bbc 콩쿠르에서 우승해 범접할 수 없는 넘사벽 세계(?)로 떠나셔 팬텀가수 출신 중창단 멤버인 최성훈 카운터테너님이 대타로 나오셨다. 방송 탄 연예인(?) 답게 열띤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 뒤 ombra mai fu(그리운 나무 그늘이여)부터 시작했다. 하루 전에 급하게 합류했는데도 지방에서 원정온 팬들도 있을 정도니 역시 it강국다운 덕질이다.
원래는 나만 아는 숨듣명이었는데 이탈리아 변호사 드라마에 ost로 쓰면서 una voce poco fa처럼 전 국민이 아는 성악곡이 됐단다;; 카운터 테너들은 헨선생님 레퍼토리들을 많이 한다는데 최카터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페라 '라크메'에 나오는 꽃들의 이중창은 출연진이 바뀌며 덩달아 바뀐 프로그램이었다. 원래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나는 거리의 제일가는 이발사'가 있어 오옷? 했지만 바뀐 곡도 나름 괜찮다. 후반부에 열창하며 퇴장하는데 마이크 없이도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은 관객들의 눈코입 오픈 현상도 유발했다.
앙코르는 아예 안 하거나 오케스트라용으로 오제의 죽음, 아디오스 노니노, 쇼선생님 장송 행진곡을 궁예 했는데 협연자들이 지휘자와 손짓을 주고받더니 그리운 금강산이 당첨되었다. 고딩때 노래방 가서 되지도 않는 가성으로 불러댔던 곡이라 급 추억 돋았다. 축하드립니다 앙코르계의 펠레가 되셨습니다.
공연에 너무나 감동받은 누군가가 앙코르를 외쳐 다 같이 웃고 마지막 곡인 한국전쟁 참전국 국가 모음곡이 나왔다. 1층에 앉은 난 알지 못했지만 2층 중블에 앉아계신 대사관 관계자들과 참전용사 유가족분들이 자국 국가가 나오면 기립으로 응답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애국가가 나올 땐 코시국만 아니었으면 한 마음으로 제창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 임선혜 소프라노님 팬클럽과 최성훈 테너님 팬들이 찾아와 출연자 출입구 앞은 시끌벅적했다. 여신님이 날개옷을 벗고 인간으로 변장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날따라 포디움 위에서 멋지게 춤을 추신 여자경 선생님과는 이번 만남이 세 번째다. 모친께서 이번에 가면 또 왔니? 하시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지난번에 브람스(오페라)때랑 정기연주회에서 봤던 분이라며 반가워하셨다. 선생님의 시그니처 아이템인 파란 셔츠와 수건은 이날도 빠지지 않았다.
모처럼 음악회나 갈까 해서 보러 왔다가 여마에님께 입덕한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분이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팬 분께 지휘자님 어디 오케스트라 지휘하시냐, 연주회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라고 질문하기까지 했으니 다음 달 강심 정기연주회는 전석 매진되지 않을까 궁예 해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서두르면서도 경건했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 숙연해지다 가도 막차 시간을 생각하면 감상에 젖어 느긋하게 걷다간 깨깨오 택시 불러야 하는 대형사고가 터지니 정신줄을 가출시키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 싸인을 받을 생각을 안 했는데 어쩌다가 받게 되었다. 업로드가 뜸하던 여자경쌤 너튜브에 오랜만에 영상이 올라와 얼굴 보고 미처 다 하지 못했던 감사의 말을 댓글로 남겨놓았더니 다음에 만나면 내 이름을 알려달라는 답글이 달려 심쿵했는데 그 '다음'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내 목소리가 작아서 이름 잘못 알아들으실까 봐 티켓에 적힌 이름 보여드렸는데 그새 내 티켓은 돌고 돌던 다른 팬 분 네임펜으로 장식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이름 모를 팬에서 뫄뫄님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출구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