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칸테 Jul 01. 2021

미니칸테의 운수 좋은 날

2021 발레축제 '한국을 빛낸 해외무용스타'

이 시간부로 덕계못을 미니칸테의 사전에서 삭제한다


콘서트홀에서 광란의 저녁을 보내고 동창이 밝으니 손가락 통증과 팔 통증이 밀려왔다. 새 악보 샀다고 피아노 앞에서 열심히 손가락을 놀린 데다가 공연장에서 물개 박수도 빼먹지 않아 손가락이 살려달라고 하기 일쑤였는데 하루나 반나절 쉬고 다시 연습해 결국 손가락이 파업하고 말았다. 


심해지는 통증을 참지 못해 얼음찜질까지 했지만 공연을 취소할 순 없었다. 우리나라에 오케스트라는 많지만 발레단은 별로 없어서 한 번 놓치면 다음 기회가 연말 호두깎는 인형밖에 없기가 아주 쉬워서다. 다행히 얼음찜질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늘 박수는 손바닥으로만 치기로 하며 길을 나섰다.

전날 신었던 예쁘고 불편한 샌들 대신 여행 가서도 신는 샌들로 신고 옷은 최대한 편하게 입고 갔다. 예당 앞에 오니 벌써 심신이 편해지는군.... 놋쇠 홀보다 예당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건 왜 그럴까? 쌍팔년도부터 자리를 지키며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덕후들의 성지 역할을 톡톡히 해서 그러나 보다. 

이날은 오페라극장 공연이 없어서 1층과 4층은 파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순간 용수철 실내악 축제 때 콘서트홀엔 공연이 없어서 인터미션 때 로비가 벌판이 되었던 신기한 광경이 뇌내에서 오버랩 현상을 일으켰다. 음악당은 콘서트홀 챔버홀 리싸홀 출입구가 모두 1층에 있어서 챔버홀과 리싸홀 공연만 있어도 어느 정도 로비에 사람이 있는데 토월극장과 자유소극장은 아예 출입구들이 다른 층에 있어서 사람이 더 없었다.

표 끊고 가려는데 어셔가 붙잡더니 안내문 안 받아가셨다며 웬 종이를 내민다. 홈피에서도 봤던 출연자 및 프로그램 변경 공지였다. 남들은 프로그램이 바뀌어서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클래식 발레 마니아는 대환영이다. 

할 일 다 했는데도 공연장 문 열어주는 시간이 안 돼서 인별에 유명한 발레 덕후 아저씨께서 오늘도 오셨나 궁금해져 로비를 한 바퀴 돌다가 뇌내 회로가 정지되었다. 강 단장님이 왜 여기에서 나오세요?ㄷㄷ 초딩때부터 무릎팍도사와 자서전을 보던 추억이 남아 말괄량이 길들이기 때 꼭 만나고 싶었는데.... 정작 그때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못 만나고 아무 생각 없이 온 공연에서 만나서 심장이 추락했다. 다른 덕후분들이 단장님을 다음 기회에 꼭 만나길 바란다고 응원해주신 덕분이다ㅎㅎ 


물론 둘 다 찐 내향인+초면이라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단장님께 할 말도 평소에 생각해놨는데 그게 공연장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을 때 아차 왜 말을 못 했지 했을 정도다;; 여자경쌤도 세 번째 만나서야 입을 제대로 뗐으니 넘사벽 유명인인 강 단장님은 오죽하리라. 카멜리아 레이디 정기공연으로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돌아 돌아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


https://youtu.be/6RyQH6h6SoY

강 단장님은 10년도 더 된 무릎팍도사에 나온 모습 그대로 머리만 짧아지셔서 유명인 알아보기 능력시험 9등급 보유자도 단번에 알아봤다. 하지만 툰치 선생님은 세월의 풍파를 제대로 맞으셔서 아예 알아보지 못했다ㅠ(하필 내가 단장님께 갔을 땐 잠깐 안 계셨고) 뒤늦게 정황을 살펴보니 툰치 선생님이 맞았고 내 눈깔을 한탄했다. TV 앞에서 툰치 선생님의 멘트에 깔깔대던 초딩이 커서 제 발로 공연장에 찾아왔는데 당연히 그동안 안 늙으시는 게 이상한 거겠지;;


한국을 빛낸 해외무용스타 공연은 여러 작품을 요약한 갈라 공연이다. 그래서 평소엔 반강제 무관객 공연이 되기 좋은 실험적인 작품도 익숙한 클래식 발레 작품들을 미끼로 좌석을 채울 수 있다. 협회도 이걸 아는지 클래식 발레 작품은 처음과 중간, 맨 끝에 넣고 창작 작품은 중간에 끼워서 모던발레 싫어병을 보유한 발레 팬들의 이탈을 막았다. 


출연자 변경으로 땜빵용 프로그램인 돈키호테의 그랑 파드되부터 시작한다. 불과 몇 주전에 풀버전을 보고 온 돈키호테지만 무슨 맛인지 다 아는 음식일수록 더 먹고 싶은 것처럼 또 보니 더 재밌는 건 무엇? 


'겨울 여행'은 모던 발레로 나오길래 뭥미를 외쳤지만 클래식 덕후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배경음악이 나온다. 무슨 곡인지는 몰랐지만 독일 가곡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어서 눈꺼풀 부착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어떤 곡인지 찾아보려는데 작품 소개에 음악이 제대로 안 나와 있어 어림잡아 곡을 가져왔는데 혹시 아니라면 댓글로 알려주기 바란다.


https://youtu.be/EngnUt1sfeg

이 곡이 맞나요?

지난주 '트리플 빌' 공연에서 봤던 '미리내길'도 재방으로 올라왔다. 전에 먹었던 약과가 너무 맛있었는데 또 사 와서 실컷 먹는 기분이었다. 국립발레단 허난설헌 패스했는데 비슷한 작품이 올라오면 보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youtu.be/o41w0dj-jDk

영스타 갈라의 첫 무대는 '플로라의 기상'이었다. 러시아 발레학교에서 졸업공연으로 선보이며 유명해져 작년부터 콩쿠르 단골 프로그램으로 올라오는 작품이다. 그래서 발레 콩쿠르 마니아에겐 익숙한 작품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전막 공연은 한 적이 없다ㅠ 모처럼 공연 보고 가신 강 단장님께서 다음 정기공연 기획할 때 레퍼토리에 넣어주셨으면 좋겠다.


https://youtu.be/__MKtgica9A

다음 영스타 무대는 '그랑 파 클래식'이었다. 여자 배리에이션 위주로 봐서 발레 피아노 악보도 여자 배리에이션만 연습했는데 이 공연에선 남자 배리에이션이 나왔다. 순간 조금 실망했지만 힘찬 동작들을 보고 마음이 운동화 끈 풀리듯 풀어졌다. 


https://youtu.be/cLOza9GoCxE?t=379

러닝타임 정중앙에 이르자 관객 잠깨기용 작품(?)으로 지젤 2 인무가 나온다. 2차 창작으로 많이 쓰는 지젤은 사랑에 눈멀어 행복한 시골 처녀 지젤과 친구들의 춤이지만 여기서는 지젤이 죽고 유령이 된 2막의 지젤과 알브레이트의 2 인무다. 우울한 분위기라 대부분의 2차 창작에는 잘 안 쓰지만 지젤의 시그니처 포즈와 연느님의 지젤은 2막에 나와 발잘알과 연느 팬들에겐 2막도 익숙하다.


유미크댄스의 '틈'은 전형적인 모던발레 작품이다. 분위기가 고조되니 몇 년 전 국립발레단에서 찍은 금연 공익광고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다. 그때는 현대무용인 줄 알고 봤는데 이것도 발레였다니?! 하고 뜨악했었지...


https://youtu.be/_LMOiRhYrtY


'봄의 제전'은 중딩시절 음악 감상 수행평가로 알게 된 작품이다. 대부분 음악 선생님들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100에서 출제하지만 그분은 찐클덕이셨는지 드선생님 기쁨의 섬, 베를리오즈 선생님 환상교향곡 중 왈츠, 사선생님 지고이네르바이젠, 쇤선생님 곡(기억 안 남)처럼 마이너 작품을 가져오셨고 그중 한 곡이 봄의 제전이었다. 당연히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문제는 모두 사전 공개해서 첫 음만 듣고도 답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각인해주셨기 때문에 기본점수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믿겠다) 그때는 이런 마이너 클래식 곡을 들어서 어디 쓰나 싶었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원작자는 전설의 발레리노 니진스키지만 이번 공연에선 출연자가 직접 안무를 다시 짜 무대까지 셀프로 올렸다. 그런데 발레가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었나? 왜 발레 공연을 보러 와서 공포 영화를 보고 있는 거야ㅠ 온몸의 땀구멍이 곤두섰을 정도니 어린이 여러분 관람불가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Human effect'는 딘의 풀어와 비슷한 느낌의 브금을 사용한 2인무 작품이다. 이 작품도 '겨울 여행'처럼 브금이 마음에 들어 제목을 알고 싶었지만 추정 곡조차 찾지 못해 속상한 상태다. 이 글 보고 계시는 발잘알님들과 관계자분 계시면 도움을 부탁드린다.


수미상관을 맞추기 위해 마지막은 클래식 발레 '해적' 3인무다. 배가 망가져 그리스 해안가 마을까지 쓸려온 해적 콘라드가 동네 처녀 메도라와 사랑에 빠지고 부하 알리는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으로 2막의 메인 요리 역할을 한다. 특이 포인트는 주인공들이 최고난도 안무를 소화하는 다른 작품과 달리 조연인 알리가 지옥 난이도 안무를 맡는 구성이다. 그래서 국발의 스타 기완리노가 알리를 맡아 솔로 배리에이션 내내 끊이지 않는 박수를 이끌어냈다ㄷㄷ 


돈 키호테도 그렇고 해적에서도 푸에테(연속 회전)만 나오면 박자 박수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현상을 보면 역시 흥의 민족이다.


일찍 끝났으니 예당 핫플 분수대도 구경하고 간다. 일부 클덕들은 공연 보고 나오는 길에 여운을 깬다며 불평하지만 나에겐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코시국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 우울할수록 밖으로 나가 쌓인 걸 푸는 정신 회복을 아예 못 하게 만들어 정신건강을 크게 해친다는 건데 곧 코시국이 끝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면 모두의 얼굴에 활기가 돌아오겠지.

그동안은 음악당에서 나와 출연자 출입구 앞에 가거나 오페라하우스에서 바로 비타민역으로 내려가서 음악당에 조명이 들어오는 줄 몰랐다. 이날 음악당은 K향 정기연주회로 떠들썩했다는데 음악당 다녀온 클래식 덕후들도 보람찬 하루를 끝마쳤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