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이 노력하다 좌절했을 상대방에 대해.
지난달부터 여기저기서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멜로디였다.
따다따다 따다따다 따다따다 따따따따따.
쉽고 간결한 멜로디에 제목까지 ‘밤양갱’이라니, 그저 귀여운 여자아이가 부르는 사랑노래려니 하다가
찬찬히 가사를 듣고, 뮤비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이 곡을 끝까지 들었을 때는, 비비라는 가수의 감정에 이입되어 안타까웠는데,
뮤비를 보며 다시 듣고는 정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뮤비 속) 장기하가 너무 억울하고 상처도 크겠다 싶었다.
공평함이 인간관계에 낄 자리가 없는 단어라 생각하지만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지 않나.
왜 (뮤비 속) 비비는 자신이 상처받고 억울하다는 듯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라는 사람을 너무 몰라줘서, 하려던 이야기를 어렵게 멈추고, 눈물을 머금은 채 “미안해”라는 짧은 한 마디 남기며 너와의 관계를 끝낸다’
노래하는 비비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거 같은데.
비비는 왜 늘 하려는 말을 어렵게 멈췄을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왜 장기하에게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고
스무고개 하듯 상대를 힘들게 했을까?
생각하고 준비하며 애썼을 장기하의 마음보다, 원하는 바를 해주지 않아 느끼는 자신의 답답함이 더 컸을까?
고작 “미안해” 한 마디 하면서,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구구절절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가, 장기하 자리에 서 있는 어린 내가 보였다.
엄마 앞에 서서,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엄마에게 ‘통과!’ 사인을 받을까 종종 대던 나를.
엄마는 늘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알아서 해라’는 엄마의 말은, 내게 주도권이나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말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는 걸 알아서 잘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오답을 제출해도,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오답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늘 종종 대고 눈치 보고 허둥대다가… 지쳐서 ‘포기’ 사인을 드는 결론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
장기하도 그랬을 것이다.
너무 지쳤을 것이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어느 것 하나 보란 듯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닌데
사랑하는 연인이 ‘말해주지 않아서 알 길이 없는’ 그 밤양갱 하나를 위해
스무고개 하듯 오만가지를 하나하나 시도해 가며
급기야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무리를 하다가
현타가 왔을 것이다.
늘 오답만 내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랑이 너무 없어서.
내어주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는 비비가, 다음 오답을 향한 노력을 잠시 멈추는 자신을 봐주지 않고
머리에서 불을 뿜어내버려서.
자신이 맞춰야 했던 정답이 밤양갱인 줄도 모르고
헛고생했던 자신의 사랑이 가엽고 초라해서.
오래전 아동학을 공부할 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어떤 유치원을 만들면서, 아이들이 원 없이 뛰어놀라고 넓디넓은 뒷마당을 확보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멀리까지 뛰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만 옹기종기 모여 놀더라고.
그런데 넓게 펜스를 둘러 뒷마당의 명확한 경계가 눈으로 확인되자
아이들이 그 펜스 끝까지 달려가며 놀더라고.
명확한 경계를 확인해야 안정감이 생겨 자율성이 자라난다고.
사람 관계도 그렇다.
무턱대고 던져주는 경계 없는 자율성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끝에 다다를 수 있다.
사랑을 주고, 받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존재는,
자녀이든 연인이든
명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함이
상대를 지치게 하고, 쪼그라들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결국 그 관계의 끝을 불러온다.
그러지 좀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