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의 시간

겨울 오후, 떡 냄새와 기계 소리 사이에서


방앗간 앞을 지나다 멈춰 섰다. 쿵쿵거리는 기계 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오래된 벽돌집 1층, '송전방앗간'이라는 녹색 간판 아래로 김이 피어올랐다.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후,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선 할머니 한 분이 기계를 다루고 계셨다. 청록색 앞치마를 두른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쏟아내고 있었다. 곡물이 맷돌 사이로 들어가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가 묘하게 정직했다.



방앗간은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이다. 대형마트에서 떡을 사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는 시대에, 이렇게 직접 곡물을 빻는 곳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방앗간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마당 한쪽엔 녹슨 기계들이 늘어서 있고, 구석엔 빨간 플라스틱 통이 쌓여 있었다.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살아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안으로 한 발 들어서자 냄새가 확 밀려왔다. 고소한 미숫가루 냄새, 쑥떡 찌는 냄새, 그리고 막 빻은 곡물의 생생한 향. 그 냄새들이 뒤섞여 공간을 채웠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갑자기 어릴 적 할머니 댁이 떠올랐다. 추석 전날이면 동네 방앗간에서 송편을 찧어오던 기억. 그때도 이런 냄새가 났었다.


방 안쪽엔 갓 만든 인절미가 쌓여 있었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떡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엔 쑥떡, 그 옆엔 시루떡.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손으로 빚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매끄럽지도, 균일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더 정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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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물으셨다. "뭐 필요해요?" 나는 얼떨결에 인절미를 샀다. 사실 떡을 사려고 들어온 건 아니었는데, 그 공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손이 갔다. 할머니는 칭찬하듯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에 만든 거예요. 신선해."


포장된 인절미를 들고 나오는데,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골목 끝 벤치에 앉아 하나를 집어 먹었다. 입안에서 쫀득하게 씹히는 떡, 콩가루의 고소함, 그리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단맛. 그게 전부였다. 복잡한 맛이 아니었다. 쌀과 콩과 설탕. 그 세 가지가 만들어낸 단순한 맛이었는데, 왜인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떡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맛이란 게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는 것. 가끔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 더 깊이 들어온다는 것. 방앗간 앞을 지나다 우연히 사 먹은 인절미 하나가, 오늘 하루를 조금 특별하게 만들었다.



다시 방앗간 앞을 지날 때, 나는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안쪽엔 오래된 브라운관 TV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나무 선반엔 재봉틀과 미싱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떡을 파는 진열대가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공간. 정리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이 공간의 매력이었다.


방앗간 구석엔 커다란 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쌀, 보리, 콩. 그 곡물들이 기계를 거쳐 가루가 되고, 떡이 되고,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이 단순했다. 복잡한 공정도, 화려한 포장도 없었다. 그냥, 곡물이 떡이 되는 일. 그게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전부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눈에 보인다는 것.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 요즘은 대부분의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포장되어 도착한다. 하지만 방앗간의 떡은 달랐다. 할머니의 손이 닿은 떡. 그 사실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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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한 조각을 먹었다. 이번엔 천천히, 음미하면서. 떡의 질감, 콩가루의 향, 그리고 입안에 남는 단맛. 그것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걸었다. 맛이란 게 단지 혀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걸, 오늘 다시 알게 되었다.


방앗간 앞을 지나며 맡은 냄새, 기계 소리, 할머니의 손길, 따뜻한 떡의 온기. 그 모든 것이 모여서 하나의 맛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맛을 기억할 것이다. 겨울 오후, 우연히 들른 방앗간에서 만난, 단순하지만 정직한 맛을.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맛에서 오는 즐거움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화려하지 않아도, 복잡하지 않아도, 진심이 담긴 음식 하나가 주는 위로. 그게 오늘 내가 방앗간에서 얻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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