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결

산책이 건네는 작은 위로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나는 현관문을 나선다.

하루를 다 써버린 몸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시간만큼은 발걸음이 가볍다.

아마도 ‘끝’이 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건넜다는, 그 소박한 성취감.


동네 뒷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봄엔 개나리가 피고, 여름엔 초록이 우거지고,

가을엔 낙엽이 쌓이고, 겨울엔 앙상한 가지가 남는다.


계절은 바뀌어도 이 길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좋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게,

중년의 나에겐 위안이다.


산책을 시작한 지 벌써 삼 년째다.

처음엔 건강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받아든 검진 결과의 붉은 글씨들이 나를 이 길로 내몰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몸보다 마음이 이 시간을 기다린다.

하루 동안 쌓인 것들을 내려놓는 시간,

누구의 부모도, 누구의 동료도 아닌,

그냥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단골 할머니는 여전히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드린다.

말이 없어도 괜찮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감이 편하다.


길 옆 벤치엔 늘 그 어르신이 앉아 계신다.

무엇을 보고 계실까.

멀리 보이는 아파트 불빛일까,

지나가는 사람들일까,

혹은 자신의 지나온 시간들일까.

언젠가 나도 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게 될까.

그때도 이 길은 여전히 이곳에 있겠지.


이십 분쯤 걸었을까. 작은 약수터가 나온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고른다.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불편하지 않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심장이 뛰고, 숨이 차고, 땀이 난다.

이 당연한 것들이 어느 날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나이 들며 배웠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조금 더 느리다.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다.


집에 돌아가면 또 다른 일상이 기다리겠지만,

적어도 이 삼십 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시간.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불 켜진 창문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저녁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하루를 정리하며,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한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산다.



현관 앞에 다다랐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오늘도 무사히, 별일 없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단한 성공도, 특별한 기쁨도 없었지만

큰 실패나 슬픔도 없었다.

그저 하루가 흘렀다. 평범하게, 무난하게.


문을 연다. 집 안의 익숙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누군가 “오늘도 수고했어요”라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안다. 내 하루를, 내 노력을.


내일도 비슷한 하루가 오겠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다른 빛이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걷고, 숨 쉬고, 고마움을 느끼며 —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현관 불빛 아래, 조용히 미소 짓는다.

오늘도, 잘 살아냈다.





“내일도 이 길 위에서, 나를 다시 만나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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