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은 이성을 이긴다
"엄마, 나 카페테리어에서 점심 사 먹어 보고 싶어."
"응? 점심을 사 먹겠다고? 왜?"
"친구들도 많이 사 먹어. 나도 해보고 싶어. 맛있대"
"음.... 글쎄, 괜찮을까?"
매일 점심을 싸가던 유치원생(Kindergartener, 우리나라 1학년 나이) 아들이 학교 카페테리어에서 점심을 사 먹어 보고 싶어 했다. 아무리 한국 나이로는 1학년 나이라지만 유치원생이 점심을 사 먹는다니, 나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계산은 어찌할 것이며, 커다란 쟁반을 들고 식탁까지 잘 이동할 수 있을지, 먹고 난 뒤처리는 어떻게 할지...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아무래도 아직은 안 되겠다며 계속 도시락을 싸 보냈는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아들은 점심 사 먹게 해 달라고 졸라댔다.
아들은 자기가 잘할 수 있다며 그럼 피자가 나오는 날만 카페테리어에서 사 먹게 해달라고 나에게 딜을 해왔다. 친구들의 피자가 맛있어 보여서 자기도 꼭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계산도, 이동도 다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친구들도 하는데 자기가 못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평상시엔 어리바리 한데 이럴 때는 콕 집어 말도 잘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피자가 나오는 날에 점심을 사 먹어 보기로 했다. 스쿨 런치 머니 계좌에 돈을 충전하면 카페테리아 계산대에서 이름만으로 결제가 가능했다. 주변에 선배맘들에게 물어보니, 조리원이 직접 조리해 주는 우리나라 같은 형태의 급식은 아니고, 거의 냉동식품을 데워주는 수준의 음식이라고 했다. 굳이 돈 내고 그걸 사 먹어야 할까 싶었지만, 꼭 해보고 싶다니 이것도 경험이지 하는 마음으로 시켜줬다.
그러던 어느 날 스쿨뱅킹을 확인하니 잔고가 꽤 줄어 있었다. 충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잔고가 벌써 이렇게 줄었나 싶었다. 사용내역을 확인해 보니 낯선 항목이 있었다. 뭔가 1불씩 거의 매일 계속 청구가 된 것이다. 이게 뭐지 하며 상세 내역을 살펴보았다.
감자칩 1불, 감자칩 1불, 감자칩 1불, 피자데이 2.5불, 감자칩 1불....
오잉? 이게 모야?
아들이 엄마한테는 말도 없이 수시로 카페테리아에서 칩을 사 먹은 내역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카페테리어에서 칩을 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 이놈의 자식을!'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호통을 치려다 진정하고 일단 아이가 학교에서 올 때를 기다렸다. '아직 한 번도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 몰라서 그랬겠지' 하며 일단 잘 타이르기로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을 앉혀놓고 물었다.
"카페테리어에서 점심시간에 감자칩 사 먹었니?"
아들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꾹 다문채 나를 쳐다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엄마가 런치 머니 확인해 보니까 감자칩 사 먹은 내용이 나오더라고. 엄마한테 허락 안 받고 이렇게 돈 쓰면 안 돼, 그리고 감자칩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그러지 마. 다음부터는 엄마한테 꼭 허락받고 사 먹어. 알겠지?"
아들은 알았노라고 대답을 했다. 단단히 주의를 주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나는 아직 아들을 너무 몰랐다.
얼마 뒤 런치 머니를 확인해 보니 다시 잔고가 줄어 있었다. 아들이 또 감자칩을 사 먹은 것이다.
이놈의 자식!!! 사 먹지 말랬는데 또 사 먹었네.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그래도 다시 참았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한참 노력하던 때였다.) 나는 아들을 불러 놓고 다시 이야기를 했고, 아들은 알겠다고 했고, 대답이 무색하게도 그런 일은 또다시 반복이 되었다. 따끔하게 말해야겠다 싶어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물었다.
"엄마가 사 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계속 사 먹었어?"
딱딱한 엄마의 말투에서 엄마의 깊숙한 화가 느껴졌는지,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항변했다.
"감자칩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고 싶어서 그랬어. 너무 맛있는데 어떻게 해. 엉엉엉... "
세상을 잃은 것 같은 눈물에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안된다고 하는 엄마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 아이에게 '안된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먹고 싶은 걸 먹는 것'은 다른 문제였나 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우리 집 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날 나는 런치 머니 계좌의 설정 메뉴에서 다음과 같은 항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칩과 아이스크림 구매를 금지하시겠습니까?
이 항목을 보는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ㅋㅋㅋ 아들 좋은 시절 다 갔네~
우리 애만 그러는 건 아니었나 보다.
칩 사 먹기 금지 항목에 체크를 해 두었는데도 계좌에 어느 날 칩 1불이 청구가 되었다. 이상해 학교에 문의를 해보니, 그날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계산대를 수기로 운영했다고 한다. 계산원에게 전산의 칩 구매 금지 체크가 보이지 않아 아들이 칩을 사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구매 금지에 체크를 해 두었음을 알고도 집요한 의지와 끈기로 감자칩 사 먹기에 성공한 우리 아들. '그래, 그 의지와 끈기로 나중에 꼭 뭐라도 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