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다양한 경험이 내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글을 쓰는 건 좋은데, 그 글을 누가 봐줄까? 네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커리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남들은 먹고살기 바쁜데 낭만 찾아 괜히 허황된 꿈을 좇는 거 아니야?"
무방비 상태에서 날아들어온 말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못한 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당당하게 방어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도 나고 서러웠다. 그 말이 맞다고 나 스스로도 인정해 버렸으니까.
나도 나를 잘 몰랐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나를 지켜줄 힘이 없다는 것을.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가방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민트색의 노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다이소에서 사 온 0.38mm 검은 펜을 들고 나에게 질문을 내던졌다.
[ 나는 누구지? ]
무작정 떠오르는 단어를 나열했다.
부모님의 딸, 한 가정의 배우자, 딸의 엄마, 경단녀, 가정주부, 여자 사람, 아줌마....
'뭐야. 이게 다야? 아냐. 좀 더 굴려보자. 나를 표현해 낼 단어를...'
페이지 위 빈칸 한번, 창 밖 풍경 한번, 커피 한 모금, 두 모금..
커피 잔은 점점 식어갔다. 볼펜을 쥐고 있던 손은 나아가지 못하고 몇 분째 멈춰 섰다.
하아.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렇다 할 내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노트한 줄에 몇 단어로 끝났다.
괜히 마음이 헛헛해진다. 몇 단어로 나라는 사람은 무취, 무색인 메마른 공기처럼 느껴졌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스멀스멀 낮은 자존감이 올라온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인 걸까...'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나에게 물어보라는 강신주 작가님의 말이 떠올랐다.
[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
끄적이던 노트의 새 페이지를 펼쳐 다시 나에게 물었다.
먼저 눈앞에 식은 커피 잔이 보였다.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던 헤이즐넛 향.
"나는 헤이즐넛 향이 나는 달달한 커피를 좋아한다. 몽실몽실 구름처럼 피어오른 우유 거품 위에 그려진 라테 아트를 좋아한다. 창 밖 너머 보이는 풍경은 노란색, 빨간색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나는 자연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나뭇가지에 봉긋 솟아난 꽃봉오리와 야리야리한 옅은 연둣빛 새싹을 피워내는 봄을 시작으로 오색 빛깔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걷는 것을 좋아한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겨울바다를 좋아한다.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한다..(....)"
0.38mm 검정펜은 제대로 임자 만난 듯 술술 써 내려갔다.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한 페이지가 훌쩍 넘어갔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헤매던 때가 있었다.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인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던 거지? 누굴 위해?'
그러고 보니 나도 나를 모르면서 누군가에게 나를 인정해달라는 말은 역설이었다.
인생이라는 배경에서 내가 빠진 빈 껍데기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의 포커스를 나에게 맞추며 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노력을 했다.
사실 노력은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나갔다.
먹고 싸고 자고 평범한 일상에서 나를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작고 사소한 생활에서 생각하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무심코 지나친 관심, 감정, 기억, 경험들이 하나둘 모여 나라는 사람이 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밤마다 나를 비난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날에 비하면
봇물 터지듯 써내려 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엄청 성장한 거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하나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내가 누구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면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라고 생각해보면 쉽게 풀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TMI 같겠지만,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관심 있게 들어주었으면 한다.
솔직히 이게 더 인간미 있고 살갑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않은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싶다면,
입체적으로 나를 소개하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진짜 그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경험을 들어주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