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시간』 카르멘 치카, 마누엘 마르솔(글) 마누엘 마르솔(그림)
세상에서 가장 꾸준한 것은 시간인 것 같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늘 흐르니까. 그 속도와 방향이 너무 한결같아서 우리는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놓치기도 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걸 모르는 것처럼.
거인도 그렇다.
하루하루가 마치 소나무 같아.
시간은… 흐르는데…아무 일도…없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겠지? 아무 일 없이.
거인의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는 매일 똑같아 보인다. 날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가 거인의 눈길을 끄는 전부인 듯. 그러나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보면 조금씩 거인 주변의 세상이, 또 거인의 몸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절은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움직인다. 거인 머리 위의 나무에서 새잎이 돋더니, 잎이 무성해지고, 색이 변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붉디붉던 거인의 털도 점점 연해지더니 분홍빛, 흰빛이 되고 턱수염도 자란다. 매일이 같아 보여도 그 안에서는 조금씩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마누엘 마르솔은 『거인의 시간』이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읽었을 때 얻어지는 게 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한다. (https://unperiodistaenelbolsillo.com/manuel-marsol-y-el-tiempo-del-gigante-puede-que-unos-pasen-por-el-libro-de-puntillas-con-la-sensacion-de-no-haber-visto-nada-pero-es-un-libro-que-guarda-recompensas-al-que-lo-ve-con-calma/) 후루룩 책장을 넘겨도 텍스트는 다 읽히겠지만,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는 현실의 지루함을 이야기하지만 그림은 그와는 반대로 시시각각 살아 변하는 자연을 표현한다. 그리고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으며 읽어야, 숨은 이야기를 잡아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 우리 자신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여도, 더 큰 범위의 시간 속에서는 완연히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어제 본 아이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지만, 일 년 전의 아이보다 키가 훌쩍 커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시나브로 변한다. 살아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순간도 조금씩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몸짓처럼 부드럽고 느리지만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거인의 시간을 지나간다. 그 안에서 우리 자신 또한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