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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슬 Jan 04. 2021

추억은 물건에 깃든다고 믿었다

그런데 버려도, 추억은 남더라


이거 언제 다 치우지?

잔기침이 나왔다. 한파 탓에 창문을 열지도 못해, 먼지가 차곡히 쌓여갔다. 후끈한 방 안에서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형 쓰레기봉투를 팽팽하게 묶어, 방앞에 놓았다. 물건, 아니 쓰레기로 가득한 방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마스크를 내렸다. 1월 1일부터 치우기 시작했으니, 이틀 째였다.


추억이 있는데 어떻게 버려!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물건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기보다, 물건을 버리지를 못한다. 어느 휴게소에서 500원을 주고 뽑은 열쇠고리를 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니 버리지 못했다. 기억도 안나는 전공 프린트들은 오지도 않을 쓸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취한 채 몇만 원을 주고 뽑은 돼지 인형, 다 털어도 10,000원 조차 안 나올 저금통까지. 물건을 버리기엔, 추억이 아까웠다.


내 방은 내 추억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툭하면 물건은 바닥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워낙에 청소를 귀찮아하는 성격이 맞긴 하지만, 공간이 부족했다. 작은 공간에 물건은 자꾸자꾸 늘어갔다. 바스락. 5년 전에 받은 드라이플라워를 건든 날이면, 방을 돌아다닐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매 년 했던 청소가 이렇게 커진 것은 어떤 갈망 때문이었다. 한 해를 방 안에 갇혀 살았다. 아마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가 터진 후, 인테리어 수요가 늘었다고 한다. 방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방에서 잘 살아가야만 했다. 나는 더이상 이 방에 살고 싶지 않았다. 살 수도 없었고.


이거 정말 버려도 될까?

하나씩 물건을 버렸다. 쉽지 않았다. 전공 PPT를 보며, 한 학기 전체를 회상했다. 그리고 종이를 접었다. 쓰레기봉투 옆에 저금통을 빼놓기도 했다. 그래도 버렸다. 저금통에는 1,700원이 있었다. "언젠가는 입지 않을까?" 그렇게 n 년 동안 입지 않은 옷도, 쓰지 않은 가방도 다 버렸다. 버리기 전에는 사진을 찍었다. 128기가 아이폰 용량은 지금 127.8기가다. 나는 핸드폰도 비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빈 책장을 좋아하는 소설들로 채웠다. 몇 백장이 넘는 영화 포스터 중 몇 개를 벽에 붙였다. 내 방 벽에는 영화 야구소녀와 라라랜드, 스포트라이트 포스터가 붙어있다. 규격이 안 맞아 툭 튀어 나와있던 수납함은 문 옆으로 옮겼다. 청소기를 몇 번을 돌렸다. 발바닥에 먼지가 안 붙었다. 문을 열고 방을 바라봤다. '탁 트였다.' 첫 느낌이었다.




정세랑 작가님의 팬이다


난생 처음으로 내 방이 예뻐 보였다. 정돈된 호텔방에 들어설 때 기분이 좋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무언가를 사고, 모으고, 추억을 회상하는 것만큼 좋았다. 방 안에 있는 시간이 좋아졌다. 예전보다 덜 괴로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방을 둘러보면, 한숨이 나오지 않았다. 버리고 비웠는데, 허전하지 않았다. 신선한 감정에 온종일 미소를 띄웠다.


버린 물건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이 버린 탓에, 또 내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 아니었던 탓에. 없으면 안 될 줄 알았던 물건들이 흐릿해지는 게 신기했다. 늘 채우기 급급했는데,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억지로 물건들을 부여잡고 어딘가에 머물러있던 게 아니었을까. 물건과 함께 잡고 있던 것은 욕심이고, 게으름이고, 추억이고, 행복이자 그리움이었다.


좀 더 가치있는 걸로 채우고 싶은 마음도 버릴려고 한다. 방 한 켠에, 마음 한 켠에 공간을 남겨두고 싶다. 버리니까 기분이 좋았다. 후련했다. 나한테는 덜어내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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