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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색림 Sep 22. 2021

미스터 로저스 이야기

문득 생각난 내 진로의 은인

고등학교 때 영어회화 수업이 있었다. 수업을 진행한 사람은 미스터 로저스라는 미국인이었다. 2미터 가까이 되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나는 그의 수업이 좋았다. 그는 토론을 무척 좋아했다. 수업시간에 영자신문을 들고 와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토론을 하다가 학생을 궁지에 몰아넣고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웃곤 했다. 특이한 넥타이를 많이 했다. 우주 행성 모양, 공룡 모양은 물론 형광색 타이도 하고 왔다. 졸업할 때 친구들과 돈을 모아 인사동에서 한글 문양이 들어간 넥타이를 사서 그에게 선물로 줬다. 얼굴에 번지던 함박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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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과제로 학기마다 영어책을 한 권 읽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 나는 1학기 땐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2학기 땐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자서전을 읽었다. 추천도서 목록에 없던 것들이라 엄밀히 말해 규칙을 어긴 셈이었지만, 미스터 로저스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중요한 책들이니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겠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두 책 모두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핵심 인물에 관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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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로저스 아저씨가 생각나서 검색을 해보다 깜짝 놀랐다. 로저스는 기자 출신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기자로 일하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우리 학교로 온 것이었다. 한국에서 영어교사를 하면서도 프리랜서로 기자 일을 계속 했다. 내가 먼 길을 돌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된 것도 그가 오래 전 심어둔 가르침 덕분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의 수업은 저널리즘 교육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읽어내고, 토론하고, 글을 쓰게 했던 그의 수업은 내가 기자로 일할 밑바탕이 됐다. 경찰이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그 시절부터 나는 기자 출신 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자 교육을 받고 있었다. 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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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쌤 그간 잘 지냈는지 연락해봐야겠다. 고맙다는 말도 해야겠다. 세상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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