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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영 Sep 12. 2020

『쇼코의 미소』후기-닳았던 인류애를 다시 부어주는

엇갈리다 화해하거나, 끝까지 닿지 못하거나

  이 책은 읽은 지 몇 개월이 되었지만, 너무 좋은 책으로 남아있어 한번 더 정리하고자 후기를 쓰게 되었다. 구름처럼 마음속에 두둥실 떠다니던 이야기들을, 회상하고자 하면 언제든 그때의 그 감정을 떠올리고 싶어 책꽂이에 책을 정리하듯 노트에 따로 목차를 정리하였다.


쇼코의 미소 _ 007

씬짜오, 씬짜오 _ 065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_ 095

한지와 영주 _ 123

먼 곳에서 온 노래 _ 183

미카엘라 _ 213

비밀 _ 243


 책의 초반부에 나왔던 이야기들이 특히 그림처럼 섬세해서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쇼코의 미소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한지와 영주 세 가지 이야기에서 특히 마음이 울렁대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최은영 작가님의 책은 독특하진 않은 일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가지고 있어 감동이 덜 할 것 같으면서도, 그 서사가 실제의 삶과 많이 닮아있어 마음에 무겁게 맺힌다.


 쇼코의 미소와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여 마음 간 거리가 가까워지게 결말이 내려졌지만, 한지와 영주에서는 주인공이 뜨겁게 사랑했던 인물에게 끝까지 닿지 못한다. 그 애타는 마음과 상실감이 현실적이어서 강하게 와 닿았다.


 우리가 자라며 가장 아프게 배우는 삶에 대한 것들 중 하나는, 내가 누군가를 떠나기도 하고 남이 나를 떠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곳에 합리적인 이유란 없다. 사람의 관계는 합리적인 이유로 맺어지고 끊어지는 어떠한 것이 아니니까. 다른 두 우주가 충돌했다가 분리되는 그 과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뒤흔든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걸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기대는 원래 덧없어서 버리고 나면 우리가 더 온전해지는 걸까. 정답은 모르겠으나 나 역시 그렇게 자라 가고 있다. 기대를 버릴수록 안정됨이 느껴지고 두 번 다신 그렇게 크게 흔들리고 싶지 않다.


 나의 이러한 모습은 타인의 기대치를 종종 충족시키지 못해 싫은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온 마음을 쏟아붓다 데이는 것에 비하면 부작용 축에도 못 낀다. 그리고 살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은, 누군가를 강렬히 좋아하는 마음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상대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 그런 무거운 마음은 강렬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 




-책 중에서(가장 좋아했던 문장)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고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 기억들이 나를 떠나 이 얼음에 붙기를.




 나도 영주처럼 기억을 아주 자세하게 하는 편이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모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보니 사람을 해맑게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나쁜 기억은 후에도 나쁜 기억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좋은 기억은 연이 끝나면 마음 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이 되어 남는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이유는 외면하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은 마음에 남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떠올리고 용서를 구한 것이 너무도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외면했던 사람이 있었고, 외면당한 때도 있었다. 비겁하고 오만한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외면한다는 것은. 그런 나의 감추고 싶었던 면을 드러내어 후회하게 하고,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것이 좋은 책이 아닐까. 순애 언니와 같은 누군가를 등 돌렸던 기억, 또 내가 순애 언니가 되었던 여러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지막 대목에서 거의 오열하다시피 울었고, 그만큼 마음 깊이 묻어져 있던 찝찝한 기억들이 눈물로 씻겨져 나갔다.


 그래, 여전히 서로가 살아있는 동안은 실망하고 서운했던 마음에 자존심이 있다며 찾지 않겠지만, 분명 죽음 앞에서는 그동안의 부재에 미안해하며 서로의 영혼을 꼭 끌어안을 거라고.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그 얼굴들을 그때는 볼 수도 있겠다는 나의 임종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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