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시작하는 설렘>
(기어코) 떠나가는 내 모습
저 멀리서 바라보는 너 안녕
(나 이제) 깊은 잠을 자려해
구름 속에 날 가둔 채
낯선 하늘에 닿을 때까지
윤종신의 <도착> 가사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듯하지만, 여자의 단호함이 느껴진다. 이 노래는 도입부부터 내 마음에 꽂혔다. 헤어진 연인과 이별하는 시점에 ‘기어코’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억누르고, 떠나가는 상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할까. 그와 반대로 쿨하게 미소 지으며, 누구보다 할 말이 많지만 우리 만남은 여기 까지라며 떠나는 여자의 마음은 과연 편할까.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이별 가사를 지겹도록 노래했던 나에게, 이 노래는 듣는 내내 흥미로운 상상과 그림을 만들어 주었다.
이 노래는 윤종신이 작사로 참여했던 하림의 <출국> 연작으로 만들어졌다. 공항에서 이별을 하고 비행기에 오른 여자의 입장을 그린 노래가 <출국>이라면, 타지에 도착해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시작 앞에 서 있는 여자를 그린 것이 <도착>이다. 가끔 이런 노래는 가사를 열심히 해석하기보다 감정 이입에 더 중점을 두곤 한다. 감정 이입을 위해 뮤직비디오를 계속 돌려 본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캡처한다.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번도 기댄 적 없는
잘 살 것 같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아
눌러 싼 가방 속 그 짐
어디에도 넌 아마 없을 걸
도착한 숙소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마음은 어떨까.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낯선 곳의 공기, 날씨,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떠오르는 색깔 등을 상상해 본다. 마치 나도 함께 그곳에 서 있는 듯이, 그녀가 느낄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씩 나열해 본다.
후련함, 홀가분, 아쉬움, 그리움, 두려움, 울적함, 설렘, 기대감...
이별 노래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정서는 슬픔이다. 하지만 이별 노래에 슬픔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비등하게 공존하는 또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다. 단순하게 슬픔을 슬픔으로만 느끼지 않고 그 안에 슬픔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느껴지는 또 다른 강렬한 감정을 찾고 느껴보는 것이다.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며, 나의 감정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노래 속 그녀와 내가 서로 이해하고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험난한 여정을 떠난 그녀에게서 슬픔이 아닌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것은 '0에서부터 시작하는 설렘'이었다.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작년 이맘때쯤 가장 원하던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1년이 지난 지금,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만두기로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너무 원했고 귀한 자리였지만 내가 계속 있어야 할 명확한 의미를 찾지 못했다.
프리랜서로 20년 가까이 살아온 나는 난생처음 사직서를 작성했다. 사인을 하고 스캔할 때까지는 무덤덤했다. 그런데 이메일 전송을 클릭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짧은 1년의 시간 동안 무한한 열정을 쏟았고 퇴사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몇 달 동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났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 또 다른 감정이 들었다. 슬픔과 함께 뭔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일을 시작했던 그날의 설렘과 또 다른 결의 설렘이었다. 그것은 시작하는 설렘이었다.
그래 나는 다시 ’0‘이 되었다. 이제 다시 ‘1’부터 시작해 볼까. 그게 사랑일 수도, 일 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