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그거 미신 아닙니까?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발견한 어떤 질서

by 청안

호기로운 미대생

나는 요즘 공적인 일에 많이 관여되어 있다. 이 상황은 언제 봐도 어이가 없다. 대학생 때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미대생이 왜 행정에 관여되는 삶을 살고 있을까. 모든 것의 발단은 ‘시도해 봤는데 되어버렸다’에 있다. 최근에는 어떤 시도든 이상하게 성사돼 버렸다. 아파트 선거에서 당선됐고, 정책 제안 경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시청이나 시의회에서 진행된 위원회 면접에서 연속으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면접관분들은 내가 평생 만나볼 일조차 없을 것 같은 분야의 직업군이었다. 그 사실을 면접이 끝나고 나서야 알고 ‘오, 신기하다’는 감상을 가졌다. 면접관분들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내가 거기서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도 됐던 걸까?’라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 물론 미리 알았더라도 내 태도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 같은 캐릭터가 흔하지 않아서 좋게 봐주신 걸까? 추측한다.


30대 여성이 체감하는 2025년 한국

함께하는 다른 구성원분들은 4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시다. 나는 30대 여성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국 사회가 훨씬 더 열려 있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나는 서양에서 공부했던 터라 스스로 편견이 적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가 더 놀랄 때가 많다. 어쩌면 2025년의 대한민국은 이미 여러 변화를 겪으며 충분히 열려 있는데, 그 변화를 직접 시도해 보는 사람이 적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팔자를 믿으시나요

나는 흔히들 말하는 ‘팔자’나 ‘복’ 같은 단어를 정말 듣기 싫어했다. 그런 단어들이 개인의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대생인 내가 공적인 일에 연관된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이게 팔자에 굴복한 사람의 삶인가?싶어 자조하게 된다.


사주 본 후기

살면서 두 번 정도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앞이 안 보여서 위로를 듣고 싶을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관(官)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많은 사주라고 들었다.

1순위 직업군은 공무원,
2순위는 군인 혹은 경찰,
3순위는 기자나 교육자였다.

나랏밥을 먹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분석을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계속 주목받고, 결정을 내리며 살지 않으면 삶이 상당히 고단해질 거라는 어두운 분석도 있었다. 내 전공과는 하나도 상관이 없어서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나는 공무원 시험 같은 시험을 준비할 생각이 없다. 공시생을 몇 명 만나봤는데, 내가 그 불확실성을 버틸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미대 졸업생은 주로 작가, 디자이너, 큐레이터가 된다. 어떻게 내가 나랏밥, 교육, 결정과 연결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주 풀이를 동양 철학 겸 가벼운 미신 정도로 취급하고 넘겼다.


런데 이제는 모든 입금 내역과 받는 물품들이 다 공적인 일과 연결된 것들뿐이다. 입금 알림이 뜰 때마다 기쁘긴 하지만,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최근 행선지도 시청이나 구청, 시의회, 공공 관련 행사밖에 없다. 주변 친구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상황인 사람이 없어서 고민 상담도 어렵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든 내가 최연소자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크다.


팔자주름이 깊어지는 나이

그렇게 듣기 싫어했던 ‘팔자’라는 단어를, 이제는 내가 먼저 내뱉는다. 상황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는 이상한 사람이 잘 꼬이는 편인데 공공과 관계된 일을 하다 보니 마치 용한 무당이 부적을 써준 듯 이상한 사람들의 출현 빈도가 낮아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래도 많이 줄어서 생활이 한결 편해졌다. 또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어도 그런 방어막이 켜지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영어를 정기적으로 가르쳐줘도 이상한 사람들의 출현 빈도가 현저히 낮아진다. 이런 일을 안 하고 살면 이상한 사람들이 한 달에도 몇 명씩 등장해서 자괴감이 커진다.


물론 이런 일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럼에도 내가 얻는 일상의 평화가 마음에 들어서 이걸 놓으면 다시 더 괴로워질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성취감도 있어서 열심히 임한다. 그동안의 인생 경험으로 보건대, 이렇게 살지 않으면 더 피곤한 삶이 펼쳐질 것 같다.


무계획이 계획입니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다른 사람을 좋은 마음으로 돕지 않으면 바로 벌이 돌아오는 건가? 이상한 상상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 분야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임기가 걸린 일들이 있다. 그리고 세세한 계획을 세우면 모든 일이 정확히 그 반대편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이제는 깊은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결심

그래도 하나의 큰 목표는 있다. 이 부적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꼭 대학원에 가고 싶다. 학원을 등록해야 한다. 체력적으로 더 힘들어질 테니, 지금은 조금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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