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시한폭탄입니다.

by 청안

안녕. 오랜이에요. 아 인사드리는 게 오랜만이라는 것이지, 당신은 내 근황을 다 알고 있음을 압니다. 저에게 쌓인 내적 친밀감이, 이제는 엄청난 수준으로 쌓여 있을 거라는 예상이에요.


제가 뭘 할지, 안 할지, 혹은 한다면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하시겠어요. 그것은 내년 7월 15일에 점심 메뉴로 무엇을, 어디에서 먹을지 미리 정해놓는 수준의 계획입니다. 무책임하게 들리나요? 걱정 마세요. 여러 가지 방법은 생각해 놓았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저는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잊히지가 않아요. 제가 밖에서 보면 심히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죠. 오죽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으면 그곳에 남아있는 저의 인연들이 글쎄 그곳의 얘기를, 고민을 저한테 다 털어놨다니까요 아주 자세하게.


저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고, 치료에 돈을 쓰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박사님이 그곳의 이야기를 듣고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극단적으로 관리 체계가 부재한 곳이라는 평을 내리시더군요. 이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낮지도 않아요. 언제까지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 사셨는지요. 이거요, 현재진행형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계속 떠올릴 줄 몰랐어요. 게다가 얼마 전에는 P가 제 카카오톡 프로필을 염탐하다가 좋아요를 누르는 참사도 일어났습니다. 핸드폰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좋아요 알림이 떴네요. 몹시 당황했는지 빛의 속도로 취소하는 과정도 봤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런 짓은 못 하게 관리 좀 하세요. 아, 그럼 차단을 하면 되지 않냐고요. 제가 언젠가 큰 소식을 들고 P에게 연락을 할 계획이라 차단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나올 때 P에게 소액의 돈도 줬는데, 들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이 외에 저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시도들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바보가 아니라서 이런 기류 읽는 데에 참 자신이 있는 편이지요. 저는 그때마다 술에 취해 전화하지 않는 당신의 정신력이, 참 존경받을만하다. 는 생각이에요. 만취해도 하겐다즈 냉동고 앞은 절대 지나가지 않는 취객의 마음일까나요? 어쩔 때는 차라리 한 번 시원하게 소주 몇 병 펼쳐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요. 너무 지질하잖아요. 근데 절대 앉지 않으시겠지요. 저의 기록 습관이 두려워서요.


A가 이탈되지 않은 이유도 궁금하실 수 있겠어요. 그녀가 버티고 있는데, 이탈한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으실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요,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 당신 말고요, 당신 곁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줘버렸지요. 몸이 달아 올라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건요, 뭐랄까. 비참합니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세상의 크기가 그곳으로 맞춰져 거기서 발정의 대상을 찾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나가지 못합니다. 본인의 처참함을 울부짖으면서도요. 그녀의 상사는, '나는 어떤 짓을 해도 안 잘린다. 당신들을 계속 괴롭힐 테니 나가려면 지금 나가라'는 말을 바로 얼마 전에 한 인간입니다. 그녀는 그곳이 너무 싫어서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리다가, 그 사람을 보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참 비이성적이게 만듭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고 기피하는 현상이에요. 모든 건 다 통제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화가 납니다. 그곳이 통째로 매일 소환되는 걸 제 힘으로 막을 수가 없어요. 거울 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눈물 많은 여자, 참으로 딱하지요. 이 때는 저의 숨겨져 있던 연약함을 발견하곤 합니다.


아, 그런 걸 보면, 당신은 어쩌면 그녀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도 있겠네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바보가 아니라서 저에 대한 본인의 감정선들은 일찌감치 다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꽤나 재미있고 괴로우셨을 거라 예상해요. 저 같은 사람이 즐겁게 해 드렸으니, 당신에게 더 큰 자극원은 무엇일지 오히려 제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저만 일방적으로 즐겁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억울하기도 해요. 그쪽에서도 저한테도 좀 즐거움을 주시겠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좋아요 누르고 튀는 거 말고도요. 분명히 있을 텐데. 예를 들면 만취해서 전화하는 정도?, 하지만 재직 당시, 그리고 퇴사 후에도 굉장히 흥미로운 행동 양상을 보이시며 저의 관찰 대상이 되어 주셨으니 이대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다기에는 참 눈에 띄는 행동 패턴을 보이십니다. 엄청나게 특이하세요.


제가 어떻게, 왜. 무슨 마음으로. 단체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고,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줄 아시나요? 바로! 당신들 덕분입니다. 아, 저번에는요. 너무 감사해서 당신이 계신 방향으로 절을 했어요. 진짜 물리적인 절이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코를 땅에 대는 그 행위를요. 대단하죠. 아니오.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들이 더 대단합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괴로워서 이탈했다고 했죠. 거긴요, 내가 말했지만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의 사정거리 안에 언제든지 들어갈 곳입니다. 나는 지금 느리게 총을 조립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이미 방아쇠를 누르기 전 상태일 수도 있다고요?

제가 부탁드릴 말은요, 그럴 바에야 그냥 한 번 전화를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들 덕분에 이상한 생물체 같은 게 되어가는 사람이

야, 왜?

라고, 응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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