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 L의 수업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겨 간식을 먹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아이의 완성된 연주를 기록하기 위해 동영상을 촬영하여 학부모님께 보내놓고 생각해보니 새삼 아이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에 내게 와서 지금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취미로 지금껏 피아노 수업을 꾸준히 지켜온 것이 정말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자신의 평생 공부로 정한 것도 아닌데 배움을 이어가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재미있어서, 혹은 지금껏 배운게 아까워서 계속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만두겠지만 아직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대단하다.
이 아이를 보고 있자니 수 년 전에 가르쳤던 또 다른 청소년 제자 H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여자아이였어서 나랑 더욱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하며 수업을 했었다. 실력도 출중해서 함께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탐색하는 재미도 있었고, 공부하고 있는 곡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했다. 결국 그 아이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 공부로 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학부모님의 걱정과 근심이 있었는데 아이의 진심이 통하여 결국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일도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에겐 으레 시험기간이 굉장한 압박이다.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압박을 느끼고 잘하지 못하면 잘하지 못하 는대로 압박을 느낀다. 그래서 시험기간이 되면 시험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에 피아노 수업을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잠시 쉬는 경우가 생긴다. 나도 청소년기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그 마음에 공감하며 이해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다 쉬어도 이 아이는 시험기간에 피아노 수업은 전혀 관련 없다고 여겼는지 시험기간과 상관없이 수업에 출석하였다. 오히려 내가 '시험기간에 피아노 학원 오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니?' 하고 물었는데, '피아노 수업 30분밖에 안되는데 이 시간에 공부한다고 시험 점수가 더 오르진 않을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공부도 잘했다.
다시 나의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 제자 L로 돌아와서, 이 아이도 시험기간이라고 피아노 수업을 쉬는 일이 없다. 이 아이에겐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피아노 수업이 이 아이의 루틴이고, 그걸 해치지 않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의 루틴을 꿋꿋하게 지키는 일,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다. 좀 과한 이야기 같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실한 어린이인 편이었지만, 성장하면서 꾀가 나고 게을러져서 대학생이 되어서는 별명이 '기부천사'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영어공부를 해보겠다고 영어학원에 등록해서는 결석하기 일쑤고, 운동하겠다고 운동센터에 등록해서는 날씨가 궂으면 곧잘 가지 않았다. 지난 월요일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에 걷기가 힘들 정도의 날씨였는데 아이들이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꿋꿋하게 피아노 수업에 출석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솔직히 이 날씨에 오지 않아도 당연히 이해하고 넘어갈 텐데 아무도 수업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좋지 않은 자세로 몸이 아파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아무리 날이 궂어도 꼬박꼬박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운동을 빠지지 않는 나로 발전했다. 나는 그 날 폭우를 뚫고 운동을 하러 갔다 왔다. 누군가의 꾸준함이 어떤 이에게는 감동일 수 있으리. 감동을 받았으니 나도 감동을 전해야만 한다.
배움이란 가르침이 없어도 가능하다. 어린이와 청소년 여러분, 오히려 제가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