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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pr 16. 2024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의 주제의식에 대한 고민

두 달째 듣고 있는 이번 소설 수업은 격주로 3장짜리 미니픽션을 쓰는 과제가 있다. 첫 번째 과제 주제는 ‘~의 제왕’, 두 번째 과제 주제는 주어진 신문기사 토대로 소설 쓰기, 그리고 이번 세 번째 과제의 주제는 <21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이야기>였다. 바로 지금 이 21세기의 동시대성이 드러나는 소설을 쓰라는 말이다.


소설의 동시대성이란 무엇일까. 선생님께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예시로 들어주셨다. 이 작품은 5.18 당시 상황뿐 아니라 그 사건 이후 지금까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과거 1980년도의 사건을 21세기까지 유효한 이야기로 다시 써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소년이 온다>는 나도 무척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인데, 5.18이 과거의 사건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그 아픔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되새겨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번 과제를 최선을 다해서 써내고 싶었다.


나는 21세기에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아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를 소설로 담아내면 좋을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내가 내 글로써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조명받게 만들고 싶은 소재가 뭐가 있을까…. 그러다 지방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가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요즘 지방의 초등학교에서는 다문화 가정 학생에 대한 차별이 문제 되고 있다고.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문화를 소재로 삼으려고 하니 아주 큰 벽에 부딪혔다. 바로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에 관련하여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에게 일화를 소개해준 친구도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동료들의 경험담을 전해준 것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소설들은 사실 에세이였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완전히 낯선 세상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또한, 무엇보다 소수자의 이야기라는 게 조심스러웠다. 다수가 알지 못하는 사회의 이면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는 특정 입장을 선택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관련하여 자료를 찾아보면서 다문화 지원 정책에 대한 찬반 여론이나 반감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과제로 제출할 습작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읽게 될 소설이 현실을 왜곡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과제를 위해 투자한 시간의 대부분을 각종 사례나 현황, 에세이를 찾아보는데 쓰고 정작 소설 자체는 거의 하루 만에 후루룩 날림으로 썼다. 사실 이번에도 소설이라 할 수 없는, 여러 에세이를 짜깁기 한 조각모음에 불과했다. 글에 들인 시간은 기가 막히게 티가 난다. 합평 시간에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지적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 이런 글이었다는 걸.


처음 과제가 제시되고, 21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나는 혹시나 언젠가 내 글로써 조명받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소외된 감정들을 떠올리고 돌아봐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보람된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과제를 쓰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이 뭉클했다. 내가 모르고 있던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쓰는 그 과정이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소설 의의는 개인의 세상 밖의 이야기를 간접경험할 수 있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다. 이번 과제는 그러한 내가 가진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건드리는 과제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 때문에 내 글들은 너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문제가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 하지만 소설이란 은근하고 뭉근하게 의식 속에서 전해져야 한다. 직접적으로 때려 박는 주제의식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명확한 통나무 같은 글은 사실 소설이라는 장치를 잘 활용하지 못한 글이다. 그래서 이렇게 강한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쩌면 소설을 쓸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정말, 세상 모든 것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설이 아니면 또 어떤가. 쨌든 써야지. 다행인 건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점점 더 명확해진다. 그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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