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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04. 2024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는 거 아니야?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번 주말에는 함께 입사한 연수원 동기 언니들과 1박 2일로 가평을 다녀왔다. 곧 출산하는 언니가 있어서, 앞으로 한동안 1박 2일은 힘들어질 테니 마지막으로 모인 자리였다. 그런데, 즐거울 줄 알았던 그 모임이 내게 너무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다름이 일방적인 나의 틀림으로 여겨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화 주제는 거의 결혼과 출산, 육아와 재테크, 부동산이었다. 대체로 현실감각이 없는 나로서는 관심이 없는 얘기들이었다. 누가 몇 살 차이 나는 사람과 결혼을 했고, 어떤 염병인 연애를 하고, 어디에 얼마짜리 집을 샀느니 하는 얘기에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휴직 중인 나에게 누군가 복직 이후의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여행을 가서 세상에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어쩌면 나도 다른 삶을 그려봐야 할 수도 있겠다는 말에 언니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얹었다. 야, 지금은 그 사람들 좋아 보이지, 나중에 다 후회해. 나도 어릴 땐 그랬어. 그런데 나이 드니까 안정적으로 돈 모으면서 사는 게 맞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 나는 대꾸했다. 삶의 방식에 맞고 틀린 게 어디 있어? 그냥 각자 원하는 대로 사는 거지. 그럼 언니들이 또 대답했다. 너도 시간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네가 여기가 첫 회사라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밖에 나가면 이렇게 좋은 회사 어디 없어. 지금은 네가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야….


대학교를 거의 칼졸업하고 24살에 입사한 나는 동기들 중 막내였다. 처음에는 언니 오빠들과 있는 게 어렵고 불편했지만, 점차 나도 막내 노릇에 익숙해졌다. 내가 기댈 수 있고 조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서 든든하기도 했다. 원체 어리바리한 탓에 챙김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6년 동안, 계속해서 나는 막내였고 가르쳐야 할 존재였다. 성선설을 믿는다는 24살의 나에게, 그들은 내가 나이가 들면 성악설을 믿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른이 되어서 그때 그들의 나이를 훌쩍 넘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성선설을 믿는다. 나의 가치관이 그들과 달랐던 것은 내가 세운 선악의 정의가 그들의 선악의 정의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근거를 듣지 않고, 그냥 “역시 아직 어려서 그렇네” 했을 뿐이다.


최근 들어서 불투명해진 내 미래에서는 결혼과 출산, 육아도 희미해졌다. 딩크니, 독신주의자니, 비건이니, 스몰웨딩이니, 다수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소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면서도 신기해했다. 나에게는 그런 강한 신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리는 내 미래도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적당히 애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한테 물어봤다. 너 애기 있는 친구들 보면 부러워? 네가 그런 삶을 살면 행복할 것 같아? …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들 언니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면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나는 항상 내 생각이 틀리거나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한다. 그런데 언니들은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사람들은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그들한테 최선인 선택이어도 나한테는 아닐 수 있는 건데, 어떻게 나도 그들과 똑같을 거라 단언하는 걸까. 내가 무엇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고, 어떤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은지 모르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게 부쩍 힘들어졌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관용을 잃어버린 게 아닌지 또 애꿎은 나 자신을 검열했다. 그러다 느낀 게,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은 오로지 나만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언니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정말 어리고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저마다 참견을 할 정도로 내가 못 미더운지 스스로를 공격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거 유해한 관계다. 내 세상에 갇히지 않으려면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도 부대끼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우리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틀린 거라고 말하면서 나를 고치려 드는 사람들이, 그래서 나를 계속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피곤하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별반 달라지는 것 없이 그냥 계속 지금의 회사를 다니는 게 나의 최선일 수도 있고, 나도 나중에 육아를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남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자. 어차피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를 향해 쏟아지는 말들이 전부 다 나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오히려 내 생각들은 더 선명해지고 견고해진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담했던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 그러니 모든 말들을 감사히 듣자.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을 그려나가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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