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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Dec 29. 2021

허락된 취향

<개천에서 사는 용> 다이아몬드를 주운 사람들, 루비를 쥔 사람들


나는 내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연스럽게 내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취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수준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찍어낸 프레스 악기와 장인이 손으로 직접 만든 악기를 모두 연주해본 사람에겐 어떤 악기가 더 좋은지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의견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난한 환경에선 살아온 사람은 가질 수 있는 취향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가끔 자극적인 단어를 써가며 자신이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어필하는 사람들을 봐왔다. 물론 숨길 이유도 없지만 굳이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깔고 대화를 시작하려 하는 것은 남들에게 자신이 ‘ 가진사람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필사적으로 어필하여 남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으로 보임으로써 열등감을 감출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되도록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기에 내가 그들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굳이 얘기하진 않지만 적당히 넘어가려 해도 집요하게 물어보거나 어떤 우연한 계기로 인해 들키기라도(?)하는 날엔 십중팔구 비아냥 거리는 답변이 돌아온다는  많은  외에도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독서를 하는 것을 보고 “~~ 문학소녀네 문학소녀야~~.” (이게  자랑인진 모르겠으나)”나는 동화책 말고 읽어본 적이 없는데~~.” 또는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보고 “우와~ 입맛이 아주 고급인가 좋은  드시네~~.” “술은 소주지 와인으로 성이 ?” 등등의 반응을 보인다던가.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반응은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들이 실제로 쿨하진 않지만 ‘매우 쿨함’이라고 적힌 빤쓰를 덮어 입음으로써 그 누추한 급소를 가리려는 심리적 방어기제다. 시실 안타까운 일이기에 이해는 하지만, 아니, 이해하기 싫어도 사회에서 이해하길 강요받는데 그러한 사건들을 실제 경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되려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거만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는 그 자체로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첫 문장에서 다행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내가 원래 속했던 사회에선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술과 술집의 분위기와 예술작품 등, 내 취향에 맞는 문화를 향유하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지 않는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여기에서 가장 큰 희생양이 되는 것은 다양한 양질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감각이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들일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들은 비록 원두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믹스커피의 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맛을 만족시켜줄 좀 더 고급스러운 커피 맛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일원들은 그들과 같은 예민한 사람들이 아닌 이상 그러한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동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취향을 허세로 취급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감히 얘기조차 꺼낼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자신이 속한 환경을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상경을 하거나 해외로(대개 일본으로 많이 가더라) 출국하기도 한다. 내 오랜 지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몇 있는데 그들은 영화 소공녀의 여주인공처럼 가정이든 지역이든 학교든 그렇게 자신이 원래 속했던 사회를 떠나 독립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에 맞는 자신 고유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살면서 정말 멋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이들이었다. 반면 원래부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고급문화를 향유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고급 취향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이 특별히 그것에 대한 고집이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부러울 수는 있어도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이지 어떤 노력을 통해 ‘획득’ 한 게 아니므로 그들이 그러한 하이엔드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그다지 ‘멋지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그중에도 기질적으로 감각이 섬세하여 완전히 자신의 고급스러운 취향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 축복받은 소수의 사람들도 존재하긴 하겠지만 전체를 놓고 봤을 때의 얘기다.)


확고한 취향을 갖는다는 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에게 취향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머쥐어야만 가질 수 있는 보석 같은 거다. 그 취향이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입맛이 될 수도, 옷차림이 될 수도, 행동이나 언행이 될 수도 있다. 그게 어떤 형태라도 보석을 쥔 이들은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내가 가진 보석이다. 동화 미운 아기 오리에서 아기 오리가 백조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는 장면에서 나는 그런 이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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