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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Feb 15. 2022

혼자일 수 있는 이유

사회가 허락하는 측은한 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아마 거의 모든 이가 자신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거의 전부임에도 세상은 정의롭게만 돌아가지 않으며 그들 역시 이 점에 물론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모든 이가 정의를 추구하지만 정의롭지 않은 세상. 누군가는 반드시 소외되고 상처 입는 세상. 그럼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가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의로운 사람이 다수인 세상에서 그 다수가 어떠한 제도나 개인의 정의롭지 않음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나마 가능하긴 한 것일까? 그들이 실제로 그 피해를 받고 있는가 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다수’ 그러니까 메이저리티에 속해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가 옳건 그르건 ‘집단’의 그것과 같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전혀 소외받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결국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실제 몸으로 느끼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지닌 소수자뿐이다.


누군가의 어떠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중들이 그의 가족을 공격하여 구성원이 피해를 본다면 잘못한 사람은 그 어떠한 행동을 한 사람일까? 아니면 애먼 가족을 공격하는 그 사람들일까? 나는 내 가치관과는 다르지만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선 옳고 그름이나 사태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내 행동 또는 나와 관련된 사건이 단지 자신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하거나 미워하거나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쩌면 법 보다 위에 있을 수 있는 온정주의, 그러니까 측은지심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자격이 필요하며 그 자격을 부여하는 건 다름 아닌 ‘다수’라는 것도. 아니, 이해했다기보단 이해해야만 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사회와 타인의 그러한 의견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싸움에 지쳤고 더는 그 상처를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그래 왔듯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보장받지 못한 개인주의, 진보, 존중 따위의 세련된 단어를 되려 덮어씀으로써 이 누추한 상처를 가리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의 삼촌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어딘가의 일용직 노동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일 내가 그만큼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상처를 받으며 얼마나  외롭게 살았을지 이번 사태를 통해 깨닫는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으며 그저 철저하게  개인으로만 사는 지금도 이지경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족을 포함한 그런  세상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며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틀린  맞다고, 잘못하지 않은  잘못했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  자신을 속이고 상처 입히며 진실을 왜곡하면서 타인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구걸하고 싶지 않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말이 있듯 두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존이란 건 어쩌면 정의보다 중요한 가치 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양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집단에서 그러니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당하는 걸 견디는 건 물론이고 신념을 지키며 고유한 개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내가 손가락질받는 상황에서, 또는 그게 두려워 당당하게 내가 받은 피해를 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더라. 거의 없더라. 살아 보니 정의가 무엇인지 처음 배우던 시절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이더라.


그래서 나는 사회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고수하며 홀로 굳건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존경스럽고 고맙다. 물론 내가 비난받지 않아야 하는 것은 정의라는 틀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이지만 앞서 말했듯 세상은 당연하지 않기에. 단편적으로나마 그러한 순간에 나를 지지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반드시 앞서 말한 큰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저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사람들 역시 사회의 일원이기에 그러한 사건이나 나의 가치관으로 인해 불거진 나의 어떠한 행동이 그들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악영향을 끼치는 계기로 작용하는 걸 원치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내가 이해심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그로 인해 그동안 받아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더 큰 상처를 받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다. 그동안 내가 왜 혼자인지, 왜 집단에 소속되려 하지 않는지, 왜 속마음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지, 왜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는지 수만 가지 이유를 대며 설명했던 건 아마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개인주의, 존중이라는 단어에 실존주의라는 말 까지 덧붙여, 그런 갖가지 멋진 깃털을 주워 모아 몸에 꽂으며 홀로 서있는 거울 속 나 자신을 위로한다. 나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강하고 희귀한 고양잇과 사람이라고. 그러나 사실 내가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내가 어떠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 외에도 그런 사람들이 홀로 존재하며 싸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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