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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May 22. 202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계층 사회와 분열된 자아

우리나라 좋은 나라야.”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몹시 괴로워 이제 웬만해선 본가에 가지 않기로 했다. 좋은 나라라. 지적재산도 엄연한 자본이고 부르주아에겐 어딜 가도  나라가 좋은 나라다. 국가가 문제가 아니라 배울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어머니가 그만큼 안전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런 거다. 누군가에겐 그저 단순히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일뿐인 이러한 발언은 현재 주된 수입원이 물류센터 노동인 나에겐 아주 고차원적인 약자 멸시로 느껴질 따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나라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프롤레타리아는 같은 국민으로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에게 마치 성범죄를 당해온 경험이 거의 없는 남성 일반이  세상을 천국이라 말하고 백인이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부정하며 월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격투기 선수가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끔 영화 기생충에서 저택의 주인들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코를 틀어막는 것을   느끼는 모멸감을 이렇게 가족들에게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벗어나 호주에서  때처럼 온전히 독립된  자신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은 무산자 여성의 삶은 완전한 지옥이라는  알기 때문이다. 단지 노동이 고되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으로 사는 것이 창피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노동자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는 자본가들이 남성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제공하는 제5종 보급품에 불과했다. 기업은 남녀 성비가 반반이라고 광고를 하고(물론 남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는 인원 모집을 위한 일종의 홍보상품으로 전락한다. (호주에서도 한인 컨트렉터들은 주로 이런 방법으로 사람 장사를 한다.) 내가 일하는 회사는 개인이 사람을 한 명 모집할 때마다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형태이기에 인원 모집 홍보를 위한 단톡방, 인터넷 게시물들이 아주 많이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미소지니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센터는 가볍게 식단이 매우 훌륭하더라는 터무니없는 말부터 시작하여(노동자 대부분이 짬밥보다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단백질 함유율이 매우 낮은 저단가 식단이다.) 어느 센터에는 여대생들이 많다느니 이곳엔 레깅스를 입은 여성 노동자들이 많다느니 여성 기혼 노동자들을 모두 쉽게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마치 누구나 ‘쉽게 노동 이외의 성적 이득을 여성노동자로부터 취할  있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광고성 짙은 말을 앵무새처럼 해대거나 그런 게시물들이 같은 아이피들로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지속적으로 올라온다. 문제는  내용이 모두 매우 과장된 허위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런 행위로 인해 누군가가 분명 이득을 얻고 있다고 봐야  것이다. 그것이 단지 개인 단위인지 업장 단위인지 기업 단위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가 무언가를 위한 홍보 상품으로 전락하는 이런 상황을 그동안 피할  있었을까? 몇 년간  모든   지켜보고 실제 개인정보 유출 등을 매우 많이 당하기도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보며 수군거리며 웃거나 나의 개인사를 묻기만 해도 실제로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나는 그동안 호주 농장에서, 한국에서 물류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일을 그냥 단순히 요령껏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적으로 한다는 말이었다. 물류 일을 10년은  사람 같다라거나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항상은 아니지만 나는 실제로  열심히 일했다. 남성이 들기에도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고 모두가 기피하는 래핑도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는 단지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급품이 아니라 노동자로. 그러니까 사용자로 하여금 나에 대한 ‘쓸모 남성 노동자와 똑같은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말이다.



얼마 전 나는 직장에서 성추행을 ‘또’ 당했다. HR 직원과 면담 도중 한국사회가 그동안 그러했듯 역시나 2 가해를 당했고  일은 덕분에 역시  안 하고 참는 게 이득이구나, 피할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능사라 느끼게 만들었다. 분명 문제를 일으킨 사원의 해고를 촉구했는데 멀쩡히  옆에 와서 일하는  또한 목격했다. 그리고 일용직인 나는 지금 일주일째 출근 확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닌 다른 일용직들도 요즈음 출근 확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혼자만의 일이라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한국사회가 그러했기에.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질타하며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돌리는 2 가해가 마치 정의로운 것인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는 사회라는  수없이 몸소 체험했기에 진실에 관계없이 내가 출근을 하지 못하는 것을 성추행 이슈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을 떨칠 수가 없는  자체가 매우 괴롭고 이런 고통을 만든 사회가 혐오스러울 따름이다.



개인에 따라, 직종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노동자 중에서도  노동자와 서비스직 노동자와 더불어 계층 피라미드 맨 하단에 위치한 여성 생산노동자의 삶은 아마 이런 날의 연속일 거다.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감, 분노, 모멸감, 배신감, 무력감 등과  함께한다. 그런 이유로 노동을 하지 못해 잔고가 모두 떨어져 가는  와중에도 내가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이 고작 사치 따위가 아니라는  분명히 한다. 꽃이나 동물이나 산이나 시냇물 같은 온갖 예쁜 것들만으로는 도저히 달래고 감춰지지 않는 어두운 감정들은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얌전한 차림으로 얌전한 인생을  생각이 없다. 그것은 빼앗긴  신체에 대한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그러니까 최소한의 주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가 내가 당해온 모든 부당한 사건의 원인을  행동과 차림새로 돌리는 것을 규탄한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 살고 싶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로, 혈연과 지연을 토대로  안전한 표면적 자아와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 노동자로서의 자아와  실존적인 삶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지금은 마치 집을 정리하듯 자아를 극단적으로 분리를 하고 있으나 여러 페르소나를 만들어 도망치는 이런 안전장치가 필요 없어지는 세상을 원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로  어떤 자아도 포기할  없다. 단지  모든 자아의 모든 혼란, 고충, 투쟁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전시하는 ‘노동 성찰의 과정이자 하나의 예술행위로 스스로 정의하는 것으로 자아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 내가   있는 전부이자 최후의 발악이다.

 ‘1 창작 집단 모든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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