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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Nov 05. 2022

웃는 사람들과 절규하는 사람들

예민충은 왜 그토록 분노하는가

SNS에 글을 최소 하루에 한 개 정도는 올리는 내가 용산구로 이사를 온 지 이틀 만에 이태원 참사가 터지고 며칠간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의심스러워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내가 29일 밤부터 어제까지 글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동네에서 무슨 일을 당해서도 아니었고 애도하는 의미에서도 아니었고 단지 사건 당일 집을 나서다가 지하철에서 당한 일을 매우 심한 욕설과 함께 포스팅했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계정이 며칠간 이용 정지를 당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히 그날 아버지 생신이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 종로구의 본가에 도착해 가족들과 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몹시 혐오하여 그런 곳에 잘 가지 않는다.




사진은 사건이 터지기 몇 시간 전 아버지 생신 상을 차릴 식재료 구입을 위해 숙대 입구역에서 회현역까지 이동하던 도중 시민들의 무질서에 매우 분노하여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써 갈긴 글이다. 내가(또는 특정한 집단이 유난히) 왜 사람들이 많은 곳을 혐오하고 대중교통에서의 단순한 무질서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아마 보통의 체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할 것이다. 그저 속으로 ‘예민충’의 ‘선비질’이라며 나를 비난하는 것에서 그치리라. 그러나 내가 이토록 무질서를 경계하는 이유는 단지 교양 없는 사람들을 꾸짖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삶에 있어 그것이 ‘고작 통행에 불편함을 겪는 조금 짜증 나는 경험’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당시 고등학교 밴드부 후배와 그 당시 남자 친구와 홍대에서 야외 공연을 보고 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 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슬램(흥에 미친 관중들이 군중 곳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몸통 박치기를 가하며 노는 행위)이라는 짓거리를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두 명 정도가 공연장 내에서 그 짓을 하기 시작하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나는 그야말로 군중에게 이리저리 휩쓸려 떠내려갔다. 슬램을 하던 사람과 강하게 부딪혔을 때, 사람들에게 짓눌렸을 때 모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잠수를 할 때처럼 숨을 한껏 들이쉬고 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 짧은 순간 동안 사람이 죽는데 몇 초 안 걸리겠구나 싶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남자 친구의 손을 놓치고 그 친구가 멀리 군중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을 때의 공포란.


아마 보통 체격의 사람들은 굳이 남성이 아니더라도 이태원 참사와 같은 아주 특수한 상황을 마주하거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느꼈던 공포를 평생 단 한 번도 느낄 일이 없을 것이고 아무리 체격 차이가 나도 ‘같은 사람’인데 사정이 뭐 그리 다를까 싶을 것이다. 고작 말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은 밀집된 군중들 속에 있으면 시야 확보 자체가 안된다고 보면 된다. 위기 극복은커녕 내가 지금 객관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작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는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는 지경이라면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더 무서운 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나를 볼 수 없다는 거다. 이처럼 약자는 아주 쉽게, 자주,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한 적 없었던 먼지처럼 그저 밀리고 넘어지고 깔릴 수 있다. (말 그대로도 비유적으로도)



그러나 그보다  무서웠던  아무리 밀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사태가 마냥 즐겁다는 듯이 그저 장난치며 웃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물리적인 압박보다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온도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공포. 나에겐 목숨이 걸린 해일만큼 중대한 일이 다른 이들에겐 조개 보다 못한 일일  있다는 ,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세상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흘러갈  있다는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세상엔 영영  혼자만 남는다. 사건 영상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그때의 공포가 떠올랐던   절규가 진짜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역시 영상 속에선 내가 겪은 바와 똑같이 일부는 그저 웃고 떠들고 있었다. 구급차를 보고도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 뒤에서 밀던 사람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설마 사람이 죽기야 하겠어?” “설마 사람이 사람에 깔려서 죽기야 했겠어?” 그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이 봐왔던 웃음이고 태연함이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힘없는 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리고 지나친 돌멩이는 어느 순간 바위가 되어 모두를 짓누른다. 나는 이번 참사의 원인이 실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의  따위를 ‘예민충’, ‘피씨충 헛소리로 여기고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사회 분위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표현이 다소 격한 것은, 그러니까  분노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약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던 사회에 대한  불만과 공포심이 모두 응축된 분노다.


이번 사태에서 여성 사망자의 수는 남성의 두배에 달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신장이 작고 근육량이 부족해 남성과 비교했을 때 참사 현장에서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이라서(약자라서) 죽었다’며 안전한 삶을 누릴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들을 꼴페미라며 조롱하는 사람들보다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면, 파티는커녕 출근조차 힘겨운 장애인들이 모든 걸 걸고 지하철 시위를 벌이던 날 비난을 퍼붓는 게 아니라 연대하던 이들이 다수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장 약한 사람이 편해지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내가 강도 5 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는 10 정도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경고를 무시했을 때 그 피해자는 결국 우리 모두가 된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깨닫고 이제라도 약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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