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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Dec 24. 2021

그해 봄에 우린

영화 ‘봄날은 간다’ 중 'One Fine Spring Day'를 들으며

‘본문에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우렁찬 신호와 함께 열차가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면, 정복을 차려입은 역무원은 손목시계로 배차시간을 재차 확인하고, 도착한 이 없는 처량한 플랫폼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대합실에 앉아 떠나는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혹여나 그가 내리지 않았을까 입을 오므리며 마음 졸인다. 그 때 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녀의 팔을 흔들고는 말한다.

“할머니. 이제 가요.”

손주의 계속된 보챔에도 아랑곳 않고 승강장만 바라보지만, 애타게 기다린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 그녀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일으켜 세우는 손주를 따라 결국 자리를 뜬다. 그렇게 텅 빈 표정으로 느릿느릿 걷는 그녀의 튼 손을 손주 녀석은 제 큼직한 손으로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암전된 화면과 함께 시작되는 음악 'One Fine Spring Day‘



내 삶 속에서    

 

나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할 말이 소진된 지루한 모임 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귀를 쫑긋 세운다. 철없던 시절에는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은 함부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고 웃고 또 울고 만다.

그러니 당연히 멜로 영화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만큼 기준도 까다롭다. 유치한 코미디는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지만, 시답잖은 멜로는 중간에 꺼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내게 영화 ‘봄날은 간다’는 이 세상 최고의 멜로 영화다. 수십 번 보았지만 아직도 장면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고, 대사마다 마음을 비켜가는 것이 없다.      


 그토록 사랑하는 이 영화를 정작 개봉 당시에는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 후 몇 년 동안은 영화 볼 시간에 게임을 했었다. 그러다 밤새 게임을 하는 걸 걱정해주던 착한 그녀와 헤어진 직후, 불 꺼진 방에 홀로 누워 이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베고 있던 베개를 누르면 눈물이 새어나올 만큼 울고 또 울었다. 


 나와 그녀는 영우(유지태 역)와 은수(이영애 역)를 전혀 닮지 않았지만, 우리도 영화 속 그들처럼 눈부신 봄을 함께 했었다. 함께 거리를 걷고 밤을 지새우고, 별일 아닌 일에 웃고 떠들었지만, 그 익숙한 순간들이 가장 특별했음은 그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깨닫고 말았다.     



너 나 사랑하니?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차마 할 수 없던 그 질문을 영화 속에서 대신 해주던 영우가 이별 후 내가 했던 못난 행동들을 고스란히 재현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창피함도 무안함도 아닌  후회였다.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는. 그래서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한 가지 말만 끝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곡명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면서, 영화 전체의 메인 테마곡인 'One Fine Spring Day‘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인트로를 시작으로,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각기 다른 버전으로 몇 차례 반복 된다. 

처음 함께 밤을 보낸 뒤, 다음날 돌아가던 영우를 베란다 창틀에 기대어 배웅하던 은수가 따뜻한 봄볕에 나른해할 때, 

어스름한 새벽, 친구의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찾아온 영우와 밤새 그를 기다린 은수가 서로를 마주보다 부서질 듯 포옹하는 애틋한 순간도,

결국 이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영우가 보리밭에 홀로 서서 바람소리를 들으며 미소 짓던 마지막 장면까지….  이 음악은 그렇게 이 아름다운 영화의 무수한 장면들을 장식했다. 그래서 내게 이 곡은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One Fine Spring Day'가 흘러나오던 순간들


청량리역에서 잃어버린 내 빨간 첫 MP3에서부터, 너무 많이 들어있어 무슨 노래가 있는지도 모를 지금 아이폰까지, 늘 이어폰을 달고 살기에 이 곡은 내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요즘도 나는 수천 곡을 랜덤으로 재생하다 이 노래가 나오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춘다. 뜨거운 여름이든, 매서운 겨울이든 상관없이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그 해 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언덕배기에는 아직도 그녀가 나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고 서성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봄날인 것일까?  

아니다. 계절은 눈부셨으나 나는 서툴고 어설펐고 그저 새파랬을 뿐이었다. 그 대비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서, 풍경은 점점 흐릿해지고 또 찬란해지는데, 풍경 속에 나는 그만큼 초라해진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그 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그 초라함마저 이제는 귀하게 느껴질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에 후회하는 것보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이 곡이 그려주는 봄날의 그 거리 위를 우리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이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와 할머니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음악 속에서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O.S.T에서 무수한 명곡들을 만들어낸 조성우 음악감독은 허감독의 다음 작품인 ‘봄날은 간다’ 앨범을 전작을 뛰어넘을 만큼 시대를 초월할 명곡들로 가득 채웠다. 그 중에서 오늘 소개한 ‘One Fine Spring Day’는 영화를 대표하는 테마곡으로, 음악 속 아코디언은 대한민국 최고의 키보디스트 故심성락 선생께서 연주해주셨다. 고령에도 선생은 최근까지 ‘놀면 뭐하니?’와 같은 방송에서 간간이 연주를 해주시다 이달 초인 2021년 12월 4일 향년 85세로 별세하셨다. 생전 약 7000여 곡을 연주하신 선생이 음악인생 50년 만에 2009년에 발표하신 공식 데뷔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꼭 들어보시길 추천한다. 이제 그의 애수어린 연주를 들을 수 없음에 문득 슬퍼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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