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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Dec 29. 2021

늦가을에 핀 수국

지난여름, 오랜 친구에게서 생일 선물로 디퓨저를 받았다. 좁은 집안 이곳저곳에 각기 다른 향을 두고, 여분까지 넉넉히 쟁여놓는 것이 디퓨저인데, 친구가 준 것은 그때까지 맡아본 적 없던 수국향이었다. 달마다 생일화가 있으며, 내가 태어난 7월의 꽃이 수국이라 했다. 선물이 도착한 뒤 나는 인증사진을 보내 재차 고마움을 표했고, 친구는 대답 대신 사진 속에서 상자 곁을 어슬렁거리던 내 고양이가 귀엽다 했다. 그이는 생색내는 법을 몰랐다.



디퓨저 상자는 표지에 청초한 수국이 큼직하게 그려진 연보라색 도서 모양이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비해 훨씬 크고 고급스러웠다. 친구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바로 뜯어서 가장 가까이 두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 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맛있는 것일수록 아껴 먹고, 좋은 것일수록 나중에 쓰는 미련한 성격 탓에, 결국 상자를 뜯지도 않고 선반 한편에 신주단지 모시듯 보관해두었다. 그리고는 얼마 못가 잊고 말았다.


 그러다 며칠 전, 화장실에 둔 디퓨저가 바닥나 책장에 있던 것을 옮겨 두면서, 새 것을 꺼낼 때였다. 가까운 이들에게 나눠주고, 부지런히 소모해서 여분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얼마치를 사야하나?’ 초라한 마음이 들 때쯤, 잊고 있던 수국향 디퓨저가 떠올랐다. 상자에는 두 계절치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테이프를 조심스레 떼고서, 표지를 열어보니 새하얀 플라스틱 트레이에 디퓨저 뿐만 아니라 우드리드 묶음과 병을 받쳐 둘 깔개종이 그리고 실크로 만든 수국 한 다발도 함께 들어있었다. 나는 푸른색의 실크 수국을 먼저 꺼내 있을 리 없는 향을 괜히 맡아보고 꽃잎을 쓰다듬으며 친구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국은 나보다 그녀를 더 닮았다.



 

저만치 앞서 가던 꿈을 좇다 발끝이 닿을 때쯤, 뒤늦게 따라온 사랑이 친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경솔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더 망설이고 서성였으리라. 그럼에도 이미 잡은 손을 놓을 수 없던 친구는 무례한 지레짐작과 뜬소문들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그저 감당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오랜 세월동안 무사히 지켜낸 것이다. 수국의 꽃말이 ‘인내심 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하얀 꽃을 피우는 수국은 토양의 성분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뿌리 내린 곳에 염기성이 강하면 꽃은 분홍빛을 띠고, 산성이 강하면 푸른색이 된다. 수국의 하얀 꽃처럼 때 묻지 않고 요령 피우는 법을 모르는 친구도 자신이 서있는 곳에 따라 색이 달라지곤 했다. 그녀의 노력과 헌신을 인정해주는 곳에서 열정 가득한 붉은 꽃처럼 피었지만, 자신을 수단과 도구로만 취급하는 집단 속에서는 바라만 봐도 눈이 시린 푸른 꽃으로 피어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꽃 피우는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물기가 많은 땅에서만 자라는 수국처럼 남 몰래 흘린 자신의 눈물을 자양분삼아 기어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꽃이 져야 그 아름다움이 그리워지듯, 남은 이들도 그녀가 떠나고서야 가치를 깨닫곤 했다.


 작지만 여러 송이가 모여 크고 아름다운 한 다발이 된 수국을 바라보며, 사소한 마음을 자주 베푸는 다정한 친구는 선물 하나를 골라도 저처럼 풍성한 것을 고르는구나 싶었다. 실크 수국을 우드 리드와 병에 꽂아 깔개를 받치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더니 어두운 방이 보다 환해졌다. 



 그러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받고서 이제야 내용물을 확인한 것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두지 않았더라도 진작 열어볼 걸, 무사히 받았다 인증사진만 덜렁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고른 것들을 보여주며 안목을 칭찬하고 내 맘에 쏙 든다 말해줄걸, 잠시라도 맡아보고 향이 너처럼 참 은은하고 다채롭다 말해줄 걸. 꽃이 피는 시기가 제 때 정해져 있듯, 마음도 전해야할 기한이 있는 것인데. 가득 들어찬 고마움을 비워내려 아등바등했으나 괜한 오해 사는 것이 두려워 시간이 흐른 뒤에 눙쳐야겠다 싶었다. 


 그 즈음 내 좁은 방안은 어느새 시원한 듯 달콤하고, 알싸한 듯 감미로운 그러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수국향이 가득했다. 그제야 친구가 생화가 아닌 디퓨저를 준 이유를 깨달았다. 인공적으로 만든 향일지라도 온종일 집에서 보내는 내 일상이 보다 향기롭기를, 그래서 언젠가 세상 밖으로 다시 나가더라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랬을 것이다. 


수국은 본디 초여름에 피어 가을쯤 잎을 떨구지만, 친구는 늦가을 내 마음에 시들지 않을 푸른 수국 한 다발을 피웠다. 늦었지만 안부를 물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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