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관찰자 Jan 14. 2022

가장 어려운 숙제

'사랑'이라 씁니다

 살면서 질문에 '답은 이것이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내가 아는 것이 진짜 진실이고, 내가 가진 관점이 변함없으며, 내 취향이 일관성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그럼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대답 중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 한 가지는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그 답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연애경험이 많지는 않으나 내게도 누군가를 사무치도록 사랑한 날들이 있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잠시 상사병을 앓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때도 저 질문의 대답은 엄마였다.

 내 트라우마들은 대부분 엄마를 거르고 생각할 수 없다. 그녀의 선택, 그녀의 행동들이 크든 작든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섭섭한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엄마다. 그럼에도 저 대답은 바꾸고 싶지는 않다. 이런 게 애증인가 보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한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을 미워했고, 가까울수록 원망했다. 그런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이었던 그는 막내아들인 내게 때론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슬프게도 짝사랑이었다. 나는 ‘엄마’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평생 짝사랑 중이다.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하시지만 이른바 그녀의 ‘최애’는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버지의 병과 죽음은 내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가 말기암을 판정받기 전까지 나는 결혼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던, 그저 평생 혼자서 자유롭게 살고 싶던 나였다. 그러다 경주에 사시던 아버지가 서울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받으실 때였다. 처음에는 치료전후로 내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다 가셨는데, 언제부턴가 아침 일찍 올라오셔서는 오후 진료가 끝나면 부랴부랴 내려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께 좀 더 머물다 가시라 권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씀하셨다.     


아유. 너도 부담스럽고 나도 부담스럽고 -


 그 때 그의 손을 잡고서 병원에서 버스터미널로 향하던 그 내리막길 위에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이제껏 내 멋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는데, 정작 내 집에는 그가 편하게 쉬다 갈만한 넉넉한 공간도, 시간 때울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래. 그것들이 전부 소용없었다 한들, 귀여운 손주 녀석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급하게 내려가셨을까. 내 마음대로 살아온 결과가 고작 병든 아버지와 하룻밤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라니….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마음을 심하게 앓았다. 그렇게 아파하다 어느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이런데 엄마가 돌아가시면?’ 그 끔찍한 상상을 할 때마다 눈물을 쏟는데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때의 아픔을 그나마 완충할 수 있는 것은 내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오래전 외할머니께서 입원 후 의식을 잃으신 뒤, 엄마는 병원에서 간병을 하다 돌아오셔서 설 명절을 치루셨다. 소식을 들은 친가 친척들이 차도를 묻자 엄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다 마지막엔 이렇게 덧붙이셨다.      


이제 가실 때가 되었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엄마가 병구완에 지치셔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당시 여든이 훨씬 넘으셨던 외할머니는 입원이 잦아지고 주기도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고도 뚜렷한 병명 대신 ‘노환’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상황이 갈음되곤 했다. 그래도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엄마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명절 직후 외할머니의 장례까지 연달아 치루면서 나는 엄마가 하신 말을 다시 생각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떠올렸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모친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그럼에도 엄마는 집에 돌아와 명절동안 자신의 역할을 다하셨다. 누구도 그래야만 한다하지 않았고, 대신할 사람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수십 년 그래왔듯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준비하며 손님맞이와 배웅을 직접 하셨다. 그리고 직후 외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사람도 엄마였고, 슬픈 소식을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한 이도 역시 엄마였다.    

  

그녀는 분명 ‘외할머니의 딸’이었으나, 동시에 ‘세 자녀를 둔 엄마’이자 ‘맏며느리’ 그리고 ‘시어머니’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세상에 낳아준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직접 가꾸어온 가족도 챙겨야 했다. 그것이 외할머니가 걸어온 삶이었고, 막 새 가정을 꾸린 큰 형이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가실 때도 되었다.”는 말은 그 길을 한 눈 팔지 않고 묵묵히 지나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할 자격을 갖추지 못해 그리도 힘들었고, 또 앞으로가 두려웠던 것이다.     

 

물론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도, 엄마의 부재는 엄청난 충격일 것이다.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수십, 수백 배 규모의 지진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테지.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지 모르고, 그리움에 눈물 훔치는 날들이 지금보다 훨씬 길지도. 그럼에도 그것은 결국 나 스스로 풀어야할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줄어들 기미 없는 세월이란 거친 물살을 타고 고향에 내려가 엄마 집 대문을 열 때 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험이 차츰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 시험공부를 이제부터라도 준비해야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늦가을에 핀 수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