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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an 24. 2022

지금을 읽으리라

'사랑'이라 씁니다

 나는 편식을 하지 않는다. 보신탕이나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재료로 만든 것 또는 심각할 정도로 맵고 짠 음식이 아니면 가리는 것이 없다. 하지만 독서 편식은 아주 심각하다. 오랫동안 선호하는 분야의 책들만 읽어왔으며 취향과 거리가 먼 책들은 손에서 오래 쥐고 있지 못하거나 손도 대지 않았다. 이를테면 심리학, 철학 서적을 좋아하지만 고전 철학 책은 거른다. 인문학서적은 즐겨 읽지만 과학서적은 사절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것이 바로 문학을 편식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문학을 좋아한다. 시, 소설 같은 장르는 딱히 가리지 않지만, 문제는 시대별 선호도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들의 나이 대에 따른 선호도’라 말할 수 있다. 나는 백석과 이해인, 정호승 시인을 좋아했으나 그 이후 세대의 시인은 기억하는 이름이 없다. 내 취향 속 한국소설계의 막내들은 아직도 공지영과 전경린, 신경숙이었고, 한강, 김영하 혹은 그보다 어린 작가들의 작품은 읽은 적이 없거나 읽었어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내 머리 속 한국 작가는 1960년대 초반 태생까지였고 그 이후에 태어난 작가들의 작품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감히 한국문학 수준이 점점 떨어졌노라 진단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시점의 한국문학을 읽지 않는 이유라 합리화 했다. 그 편협한 착각은 작가들의 나이대가 낮아질수록 더해서 내 또래는 말할 것도 없고 나보다 어린 작가들의 작품은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실생활에서 나는 나이와 출신에 비해 그다지 보수적이지 않다는 말을 듣곤 했으나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만큼은 세상에 나만한 꼰대도 없었다. 대체 왜 이랬던 것일까?   

  

 문학은 내게 단순한 감동이나 재미를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문학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했고,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봤으며, 앞으로 살아가야할 방향을 결정했다. ‘윤오영’의 ‘달밤’을 통해 내가 바라는 정서가 성립되었고,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없다’를 통해 사랑하는 이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수렁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백석의 ‘흰 바람 벽이 있어’였고, 김달진의 ‘체념’을 통해 내 삶의 관통 하는 키워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오로지 부모 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만 해왔다. 그 이후 세대의 작품에서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꼴찌상 두 번 정도 받은 게 전부였는데, 나는 아직도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작가들의 잘 쓴 글을 보면 시샘이 난다. 가뜩이나 부럽고 질투가 나는데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감동이나 깨우침을 얻으라니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억지로라도 읽어야 할 때면 겁부터 덜컥 났다.           

‘상상도 못할 만큼 문체가 뛰어나면 어떡하지’     

‘어지러울 만큼 큰 깨달음을 얻으면 어떡하지’     

     

그런 염려들을 가지고 책을 펼치다 그 수준에 도달 못했다 싶으면 ‘다행이다.’ ‘거봐. 요즘 글 별 것 없어.’하고 안도를 했다. 이런 수준 낮은 열등감이 내가 현 시대의 문학을 외면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 얼마 전 독서모임을 재개하면서 이현석 작가의 단편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를 읽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서너살 어린 작가였다.     

  



우리 독서모임은 몇 년 전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를 함께 읽으며 시작된 모임이었다. ‘열하일기’가 세 권이니 한 번에 다 읽고 토론하기보다 긴 호흡으로 읽기를 희망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다. 선생은 1780년 여름에 출발해 늦가을에 조선으로 돌아왔고, 우린 그의 여행 시기를 따라 읽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 해 여름과 가을 우리는 2주에 한 번씩 랜선으로 모여 18세기의 청나라를 함께 여행을 했으며, 마지막까지 모두들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1년이 지나서야 뒤풀이를 치뤘고, 직후 나는 ‘책을 천천히 읽는 모임’으로 재개하자고 요청했다. 모두들 흔쾌히 동의한 후 우리가 처음으로 선정한 책이 ‘다른 세계에서도’였던 것이다.       

    

300페이지 정도의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페미니즘 운동과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른 세계에서도’, 젊은 여성의 사랑을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와 접목시켜 풀어낸 ‘컨프론테이션‘, 범죄자의 인권 문제를 두고 조사위원이 겪게 되는 갈등을 다룬 ’참(站)‘ 등 수록된 모든 소설이 우리가 한 번쯤 이야기해 봐야할 이야기들이었다. 이 얇은 책으로 우린 네 번의 만남을 가지며 진지하고 긴 대화를 나눴다. 때로는 소설 속 주인공이 겪게 되는 갈등에 함께 공감했고, 때로는 치열하게 토론하며 시야의 간극을 좁혀갔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나보다 어린 작가 ‘이현석’이 나보다 글도 훨씬 잘 쓰고 생각도 깊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과 모순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여러 기반 지식과 또 다른 관점들을 학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현재 출간되는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깨우쳤다.      


개인은 아주 넓은 이 세상을 다 볼 수 없을 뿐더러 평생 극히 일부만 볼 수 있다. 정보 또한 시시각각 엄청난 양이 쏟아져서, 우리는 필터링을 포기하거나, 완전히 차단하거나, 결국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우리가 이 시대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유행 중 하나라서가 아니다. 문학은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들을 가장 우아하고 진지하게 들려주기 때문에, 이 사회와 시대의 구성원으로 반드시 직시해야할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었다.     


○○ 미만 잡-


인터넷 댓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표현에는 자기가 정한 기준이 절대적이며 그 기준을 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잡것’들로 분류하겠다는 끔찍한 편견과 갈라치기가 담겨있다. ‘라떼는 말야’로 시작하는 꼰대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 미만 잡-’이라 말하는 자도 나이와 상관없이 ‘꼰대’라 불러도 무리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 꼰대였다. 나는 입으로 외치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서 ‘박완서 미만 잡-’, ‘정호승 미만 잡-’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현대소설모임을 통해 편협했던 나 자신을 통렬히 반성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에 좋은 질문을 던진 문학을 읽겠다고 다짐한다. 그 길을 기꺼이 함께 해준 다섯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2년 2월 2일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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