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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담 Jul 30. 2020

나는 왜 '터프'가 되었는가

<젠더는 해롭다> 옮긴이의 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대학 동아리를 함께 했던 우리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지하철을 같이 타곤 했다. 약간은 취한 채로, 막차에 실려 덜컹거리며 어떤 이야기를 나눴더라? 아, 그때 나는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친구는 속 썩이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우리를 괴롭히지만 어쩐지 놓을 수 없던 우리 주변의 남자 얘기를 다 했다 싶으면, 남자 작가, 남자 감독, 남자 음악가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 생각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게 삶이고 예술이고 청춘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가 남자 때문에 서로에게서 고립되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는데 못한 이야기를, 다시 만나서야 알았다. 공백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허겁지겁 여자로 살아가는 삶에 관해, 고통에 관해, 분노에 관해 주워섬겼다. 우리의 삶은 달랐지만 같았다. 남자 얘기나 하며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 짜릿한 공감의 순간을 깬 건 친구의 말 한 마디였다. “난 터프가 정말 싫어!” 친구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난 그 말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나는 머쓱하게 “어… 내가 그 터프야.”라고 대답해야 했다.


거칠고 야성적이라는 뜻의 터프tough가 아니었다.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의 약자인 터프TERF를 말하는 거였다. 친구가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대도 ‘혐오자’ 소리를 듣는 쉴라 제프리스의 책을 두 권이나 번역한 나는 ‘그 터프’가 맞을 것이다. 면전에서 싫다는 말을 듣게 됐지만 당황했을 뿐 그리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온라인 페미니즘 공동체가 쪼개지는 경험을 하면서, 또 회색지대만 있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면서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처음부터 ‘터프’는 아니었기에,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나는 어쩌다가 나치와 다를 게 없다고 여겨지는 ‘터프’가 되었을까?




내가 남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사회는 여자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내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책 속의 용감한 주인공은 남자였고, 여자 인물들은 내가 이입하기에는 너무 악하거나 예뻤다. 처음으로 팬티에 피가 비쳤을 때 나는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자 몸의 모든 것이 부끄럽고 싫었다. 몸과는 관련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소위 ‘젠더 불쾌감’의 설명과 일치한다. 내가 자랄 때에도 젠더퀴어, 에이젠더, 젠더리스 같은 말이 지금처럼 보편적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여자를 버리고 그렇게 정체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유일한 트랜스젠더는 ‘여자보다 더 예쁜’ 하리수였다.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내가 여자됨과 여성성에 느끼는 거부감을 복에 겨운 고민인양 느끼게 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그냥 저냥 여성성과 타협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화장을 열심히 공부하고, 서툴게 렌즈를 끼다가 각막염이 오기도 했다. 알바를 해서 번 돈은 코르셋 용품을 하나 둘 사다 보면 날아가버렸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즈음에는 제3물결 페미니즘이 학계를 집어삼킨 상태였다.  나는 내 주변 여자들이 그렇듯 ‘굳이 따지자면’ 페미니스트였다. 페미니즘은 시시한 상식이었고 나에게 해줄 게 없어 보였다. 페미니즘은 나 같은 보통 여자를 위해 이룰 건 다 이뤄버려서 이제 다른 소수자를 돌보는 운동에 가까웠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당연히 그런 소수자 중 하나였다.) 페미니즘이 생태주의부터 자본주의까지 온갖 불의에 맞서 싸울 때 나는 여자로서 응원이나 해주면 되는 거였다.

내가 페미니즘을 남일로 여긴 데에는 젠더라는 단어를 둘러싼 모호함이 한몫 했다. 배웠다는 사람들은 ‘여성’이나 ‘성별’이 들어갈 자리에 젠더를 쓰면 세심하고 고상해 보이기라도 하는 양 젠더를 남발했다. 나는 내가 무식해서 젠더라는 말이 어려운 줄 알았다. 예컨대 젠더는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트랜스젠더가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라면 젠더는 좋은 거일텐데, ‘젠더 폭력’과 ‘젠더 위계’처럼 쓰이기도 하니 나빠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젠더 폭력’은 누가 누구를 때리는지를 가리고, ‘젠더 위계’는 누가 누구 위에 있는지를 가렸다. ‘젠더 차별’은 내가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했다.


그러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여자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고 괴로웠지만 묻어두었던 지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으로 떠올랐다. ‘내가 여자구나.’ ‘여자라는 건 이런 거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폭발적인 깨달음이었다. 우주가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얗게 태우고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사슬을 한 두개 끊으면 자유로워지는 줄 알았는데, 끊고 끊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억압되어 왔는지가 보였다. 자고 일어나면 자매들은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따라가기 바빴다.


여자와 여자로서 연결되는 경험은 처음에는 통쾌하고 충만하기만 했다. ‘여자만 챙기자’라는 단순한 원칙에는 반목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곧 ‘게이 남자는?’이라는 질문에서 고통스러운 분열이 시작됐다. 녹색 땅이라고 믿었던 공동체가 깨지고 나서야 겨우 ‘게이 남자도 남자이며, 남성 특권으로 여자를 착취하기도 한다’라는 입장을 정했다. 그러자 또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가 왜?’ 처음에는 그렇게 반문했다. 메갈리아 사이트에서만 해도 누가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하면 ‘트랜스 여성도 여자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는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됐구나’라고 어쩐지 안심하면서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임시 대피소를 세운 우리에게 더 이상의 성역은 없었다. 이미 ‘코르셋’이라는 단어로 여자에게 강요되는 미용 관습을 분석했고 이에 대한 거부감을 학습한 상태였다. 나는 그때야 처음 여장 남자 머릿속의 ‘여자’가 어떤 것인지를 접했다. 구멍 뚫린 검은 스타킹과 가터벨트,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 가발까지, 우리가 버리려는 것보다도 더 과도하게 ‘코르셋’을 입고서 그 사실에 성적으로 흥분하는 남자들의 글과 사진을 봤다. 저런 게 ‘여자’라고? 여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탈코르셋’ 담론과 그런 남자가 여자로 대해질 권리는 분명히 충돌하고 있었다.


어떤 자매들은 트랜스젠더는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남성 신체 트랜스젠더는 사회가 여성성을 강요하기에 여자로 인정받기 위해 ‘코르셋’을 입을 뿐이라고도 했다. 내가 여자로 살아온 직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난 해는 유독 태중 여아 살해가 많았던 해였다. 내 또래 자매들이 죽음을 가까스로 피해야 했던 건 성별 때문이지 뭘 가리키는지도 모르겠는 젠더 때문이 아니었다. 출석번호가 남자보다 늦게 시작하고 암묵적으로 부반장에 만족해야 했던 건 내가 ‘여성적 체질’을 타고 나서도 아니고, 의사가 나에게 성별을 잘못 ‘지정’해서도 아니었다. 피지배 계급에 해당하는 신체 구조 때문이었다. ‘젠더 이분법’이 문제인 게 아니라, 확연히 둘로 구분되는 신체 구조가 탄탄한 지배-피지배 체계를 만들어 벗어날 수 없이 우리를 옭아맨다는 게 문제였다. 여자라면 여성성에 최소한 양가감정을 느끼지 여장 남자처럼 무작정 매혹되기만 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 싸운 건 싸운 것도 아닌 것처럼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됐다. 남자에게 돌을 던질 때에는 돌을 던져도 날아가는 동안 계란이 되고, 남성 지배의 철옹성이 남자를 보호했다. 우린 적어도 힘을 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끼리 싸울 때는 원형 경기장에서 노예 신분으로 싸우는 것과 같았다. 세상은 우리를 구경하고 누가 죽건 다치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매들이 픽픽 쓰러져 나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판단은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나는 한동안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우리끼리 꼭 싸워야 할까? 젠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간지대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는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국 잠시 인터넷을 껐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열어두고 닥치는대로 퀴어 학자의 이론서와 트랜스젠더가 직접 쓴 수기를 읽었다. 교수님, 친구, 동기, 가족을 가리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이 문제를 꺼냈다. 내가 주저하는 데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 나보다 먼저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 우리보다 훨씬 페미니즘이 ‘발전’했다는 서구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리즘을 옹호한다는 게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누군가 제발 날 설득해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설득되는 데 실패했다.


퀴어 이론서는 한 장 넘기기가 어려울 만큼 까다로웠고 기어이 이해하고 나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게 된 주디스 버틀러의 한 책은 펼친 면 전체가 전에 읽은 사람의 밑줄과 메모로 가득했다. 어떤 곳에는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대학생이 이럴진데 고등학교만 마치고 경리로 취직해 가족을 건사해온 엄마에게 이 내용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엄마의 삶과 페미니즘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존을 외치는데 이건 고상한 지적 스포츠라는 생각만 들었다. 트랜스젠더의 수기도 다를 건 없었다. 개인의 삶에는 연민이 들었지만 어떤 말로 포장해봐도 여성성과 남성성 없이 젠더를 설명할 수 없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알고보니 내 주변의 똑똑한 사람들은 젠더에 대해 깊은 사유가 있어서 트랜스젠더리즘을 좋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여자의 삶을 이루는 건 생물학적 조건과 피지배 계급으로서 억압받은 경험이 아니냐고, 둘 다 없는 사람을 여자로 인정하면 여자의 정치적 저항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캐물으면 인정은 하면서도 끝에 가서는 공교롭게도 다들 자기 트랜스젠더 친구 이야기를 했다. 아니면 자기가 본 소설, 다큐멘터리, 영화 속의 트랜스젠더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 사람이 갖는 여자라는 ‘느낌’과 진정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막상 여자인 본인은 여자라는 느낌이 뭔지 모르겠다고 수긍하면서도 말이다. 여자가 무엇인가에 대한 한 여자가 전문가여야 하지 않는가? 남자의 시각은 그렇게 여자들끼리 끈끈한 관계를 맺는 걸 또다시 방해했다. 실망스러웠고 착잡했다.


그 사이 트랜스젠더리즘은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남자들은 항상 페미니스트를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이제는 티셔츠 한 장 입었다고 일자리에서 잘리게 만들 정도로 극심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여자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불법촬영을 반대하는 시위까지 와서 시위자들을 불법촬영하는 판이었다. 남자를 시위에 허용하면 실질적인 생존 위협이 되는데도, 퀴어 진영은 생물학적 여자만 출입 가능하다는 원칙을 물고 늘어지며 ‘보지 검색대’를 설치할 거냐고 조롱했다. 일부 페미니즘 행사는 여자만 출입 가능하다고 공고했다가 반발에 취소되기도 했다. 남성 신체 트랜스젠더도 여자라며 출입을 허용했던 행사에서는 남성 신체 트랜스젠더의 성폭력이 불거졌다.


날 ‘터프’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어떻게 보면 ‘터프’라는 딱지였다. 서양권에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이 단어는 전 세계에서 한국 페미니스트들만 잘못된 길에 접어든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누군가는 우리처럼 생각하고 우리처럼 욕을 먹고 있었다. 그게 반가워서 검색을 거듭하다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조류를 접하고 쉴라 제프리스라는 학자를 알게 됐다. 주장의 골자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제프리스의 첫 책을 크라우드펀딩으로 출간한다는 소식에 무작정 번역을 시켜달라고 열다북스의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나는 제프리스의 책을 번역하고 제프리스 한국 초청 강연을 준비하는 ‘쉴라의 자매들’로 활동할만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터프’가 되었다.




개인적인 역사를 이렇게 길게 서술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최근 한국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해온 온라인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젠더 비판적인 시각이 주류다. 나의 경험은 많은 자매의 경험이기도 하기에, 어떤 경로로 한국이 ‘터프밭’이 되었는지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또한 트랜스젠더리즘 문제를 낱낱이 파헤친 이 훌륭한 책이 번역되기 전에도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젠더 비판을 자생적으로 발전시켜왔다는 사실도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더 솔직히는 남성 신체 트랜스젠더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내 친구 같은 사람들이 ‘터프’를 머리에 뿔난 무식하고 못된 무리로만 뭉뚱그려 인식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사연과 이유를 지닌 같은 여자로 봐주기를 바랐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 남았다. 책을 쓰는 내내 역자 서문에서 내 입장을 밝힐지 말지를 고민했다. 어떤 책을 번역한다는 게 꼭 저자와 의견이 일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번역자는 전달만 하면 된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나도 충분히 그렇게 한 발 물러나서 저자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과 퀴어 진영의 공격이 두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미 트위터 계정에서 젠더를 비판하는 트윗을 한 번 올렸다가 “공부를 안한 사람”이자 “개좆밥”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전 사이트 「딕셔너리닷컴」은 ‘터프’와 관련된 표현에 당당히 ‘터프를 때리자punch a TERF’를 올려 두었다. 불과 세 달 전인 올해 6월 영국의 저명한 래디컬 페미니스트 줄리 빈델Julie Bindel은 에든버러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실제로 치마 입은 남자에게 습격 당했는데, 『텔레그래프』 같은 언론은 대학 LGBT 단체 임원들이 줄사퇴했다는 데 집중하면서 사건을 축소보도했다. 책의 출간을 기념하여 저자 쉴라 제프리스를 한국에 초청한다는 소식에 광분하며 ‘제프리스를 죽이고 싶다’라고 하는 한국 트위터리안의 반응도 직접 보았다. 이렇게 ‘터프’는 뭘 당하건 ‘그럴 만한 년’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번역가라고 규정한다. 내가 번역하는 책은 나에게 떠맡겨진 책이 아니라, 열다북스의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논의를 거치며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된 책이다. 나는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게 방어적으로 번역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조금 모험적이라도 한국 페미니즘이 걸어온 궤적과 앞으로 나아갈 좌표를 번역에 반영하려 노력한다. 누군가 내 역자 서문을 보고 번역자가 원치도 않는 논란에 휘말려 곤혹스럽겠다는 인상을 받는다면 두고두고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번역문을 제시하기에 앞서 내가 어떤 입장에서 이 책에 접근했는지 밝히는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쉴라 제프리스처럼 젠더를 박살내고 싶은 페미니스트로서 이 책을 번역했으며, 젠더를 가장 효과적으로 박살낼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려 했다. 젠더의 용례는 혼탁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젠더 정정법은 법명에 젠더가 들어있지만 실제로는 서류상 성별을 바꾸도록 허락한다. 책에서 이미 이런 혼란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원문의 젠더gender는 모두 젠더로, 섹스sex는 모두 성별로 옮겼다. 지난 대선 홍준표 후보는 “트랜스젠더는 들어봤는데 젠더 폭력은 뭔가”라고 발언했다가 빈축을 샀지만, 막상 젠더의 뜻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 여러분도 젠더를 없애야 할 해로운 사회적 구성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저자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자주 동사로 쓴다. 트랜스젠더리즘이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행위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번역에서도 ‘트랜스젠더 하다’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썼다. 본인이 실은 여자 혹은 남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주로 ‘트랜스젠더 하는’ 사람 혹은 ‘트랜스젠더 한’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말이다. 성별을 밝혀야 할 때는 저자의 표현을 살려 ‘남성 신체 트랜스젠더male-bodied transgender’ 혹은 ‘여성 신체 트랜스젠더female-bodied transgender’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쓸 때 우리는 수술이 신체적 성별을 바꾸지 않음을 기억하게 된다.


트랜스젠더 하는 사람이 외관을 바꾸려고 받는 수술을 뭐라고 부를지 고민이 많았다. 원문에서는 성별 재지정 수술sex reassignment과 성전환 수술sex change라는 표현을 병용한다. 성별 재지정 수술은 국가 혹은 의사가 임의적으로 성별을 ‘지정’했다고 보는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를 담은 용어다. 성전환 수술은 우리 귀에 가장 친숙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시 성별이 바뀔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저자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필요 이상의 논란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볼 수 있는 번역자로서 다른 단어를 만들어 제시하고 싶었다. 과감하게 ‘성형수술’이라고 부를까도 고려했다. 몸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과 몸을 해치는 결과는 일반적 의미의 성형 수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트랜스젠더 수술이라는 명칭이 직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며 일부 맥락에서는 성전환에 따옴표를 쳐 표기했다.


이 책에서는 호르몬 요법이나 트랜스젠더 수술을 ‘치료’라고 일컫지 않았다. 저자가 쓴 트리트먼트treatment라는 영단어는 보통 ‘치료’라고 번역되지만 두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트리트먼트를 “환자의 병이나 상처에 가하는 의료적 돌봄”이라고 설명하는 반면, 표준국어대사전은 ‘치료’의 뜻을 “병이나 상처 따위를 잘 다스려 낫게 함”이라고 푼다. 즉 낫지 않으면 치료라고 할 수 없다. 책은 호르몬 요법과 트랜스젠더 수술이 환자를 낫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환자가 처한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꼭 낫게 한다는 뉘앙스가 없는 ‘처치’를 번역어로 골랐고, 호르몬 요법과 트랜스젠더 수술을 묶어 주로 ‘트랜스젠더 처치’라는 표현을 썼다.


‘트랜스젠더 아동’이라는 단어는 항상 따옴표를 쳤다. 이런 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트랜스젠더리즘의 해악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여성적 체질’을 가졌다는 남자 어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저 핑크색이 좋았을 뿐인 남자아이, 그저 다른 여자를 좋아할 뿐인 여자아이가 희생되고 있다. 저자는 가부장제 사회가 이들을 ‘트랜스젠더화transgendering’ 해서 위협이 될 만한 싹을 자르고 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교활하게도 아동이 자기 몸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때에만 아동의 인지 능력과 선택권을 높게 친다. 아동이 성폭력, 성 착취, 성적 대상화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말하지 않으면서, 아동이 성폭력, 성착취, 성적 대상화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아동 트랜스젠더화 현상이 활개치는 배경이다.


번역을 하면서 ‘여장’이라는 말의 쓸모를 재발견했다. 저자가 길게 풀어서 설명한 행위를 여장으로 함축할 수 있을 때가 많았다. 여장을 쓰면 남자가 트랜스젠더 현상을 주도하고 있음이 한방에 드러났다. 또한 이런 남자들이 화장과 옷차림, 머리 스타일, 걸음걸이까지 여자에게 강요되는 ‘코르셋’, 다시 말해 여성성 일체를 탐닉한다는 사실을 매번 서술하지 않아도 됐다. 여장은 정체성이 아니라 명백히 일종의 행위기도 하다. 아마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면 저자도 유용하게 활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전에 번역한 두 권의 책에서 여자를 부수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그녀’라는 대명사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여자에게만 ‘그’라는 대명사를 썼다. ‘그녀’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 여성 인칭 대명사 ‘쉬’의 번역어로서 한국어에 편입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여자도 ‘그’라고 불렸으며, 지금도 문법적으로는 여자를 ‘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 트랜스젠더리즘을 떠받드는 사람들은 본인이 여자라고 주장하는 특정 개인을 실제 ‘여자’로 간주한다는 티를 내기 위해 어색할 정도로 ‘그녀’를 남발하곤 한다. 트랜스젠더리즘은 페미니즘 운동과 무수한 지점에서 충돌하고 이건 아주 작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대명사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지형은 한국과는 좀 다르다. 일찍부터 여성 인칭 대명사와 남성 인칭 대명사가 존재했던 영미권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가 인간의 기본형인 것처럼 여자까지 남성 인칭 대명사 ‘히he’로 묶이지 않게 하려고 싸웠다. 그런 만큼 페미니스트들은 여자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쉬’를 소중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구의 트랜스젠더 활동가들도 대명사를 쟁점화하며, ‘쉬’를 남자와 나눠 쓸 것을 강요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맥락을 고려하며 매 문장을 저울질해야 했다. 기본적으로는 ‘그녀’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여자를 지칭할 때는 ‘그’라고 하고, 남자는 이름으로 부르며 대명사를 피했다. 이 책에서의 ‘그’는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자임을 밝혀둔다. ‘쉬’라는 대명사를 부각해야 할 때는 ‘여성 인칭 대명사’라고 썼다. 딱 한 곳에는 도저히 그러기 힘들어서 ‘그녀’를 쓰고 따옴표를 붙였다. 반면 ‘히’라는 대명사가 전면부로 등장할 때는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에 대항하여 만든 ‘그남’을 써보았다. 의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정 ‘그녀’를 버리기 힘든 분이라면 꼭 ‘그남’도 같이 써보기를 권한다.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정의될 때가 많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자마저도 같은 여자를 결혼 여부로만 구분 짓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어떻게 가리킬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일단 여자를 집안에만 있어야 할 사람 취급하는 ‘아내’나 ‘집사람’ 등의 단어를 배제한 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여러 방법을 써보았다. ‘미러링’의 원칙에 입각해 여자를 기준으로 남자를 설명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다. 남자를 남편이라고 칭할 때 여자는 그냥 여자라고 쓸 수 있었다. 길게 풀어도 될 때는 ‘~와 결혼한 여자’라고 했다. 결혼한 여자를 ‘기혼’이라고만 부를 때는 잊기 쉬운 사실, 즉 여자는 어떻든 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낯선 표현이지만 말부터라도 ‘남편’과 동등한 무게를 가지는 ‘여편’도 섞어 썼다. ‘여자 배우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된 후 여자에게만 공감하고 여자에게만 이입하는 연습을 해왔다. 내가 번역한 『여자는 인질이다』는 결론 부분에서 여자가 공감 능력을 자기 것으로 되찾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 지배 사회는 여자의 공감 능력이 “천연 자원”인 양 착취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까딱 정신을 놓으면 반말을 찍찍 하고 난폭 운전을 하는 남자 택시 기사의 고충을 들어주며 진심 어린 말투로 “많이 힘드시겠어요”라고 위로를 건네곤 한다. 찜통 급식실에서 저임금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일하는 여성 급식 노동자의 고통은 알지도 못하면서, 남성 택배 노동자의 눈치를 보며 택배를 시키기도 한다. 그때마다 내 안의 여성혐오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각오를 다시 다진다.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어 이 책을 번역하고 역자 서문을 쓰는 동안, 그런 연습 덕분인지 두려움도 용기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는 여자들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 피해자라는 사실을 회피할 샛길을 터준다. 왜 그러고 싶은지는 절절히 다가온다. 그런 여자들에게 이 책이 상처가 되고, 그들의 분노가 나를 향할까봐 무섭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을 잃을까봐 무섭다. 그러나 우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피해자로 남는다. 함께 손을 잡고 원형 경기장을 탈출할 길을 찾아야 한다. 남성 지배의 하중을 견디는 젠더라는 대들보를 무너트려야만 한다. 그들이 남자에게 내주는 공감 능력의 자투리라도 내게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멍울이 잡히는 가슴을 혐오하고 정혈 흔적을 숨기고 있을 여자 청소년을 생각하면 과거의 내가 생각나 절박한 용기가 솟는다. 여자가 ‘젠더퀴어’가 되지 않아도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실명으로건 익명으로건 여자만의 공간에서 함께 일을 도모하고 의견을 나누는 여러 자매들도 용기의 원천이다. 우리가 여자만의 공간과 자매애라는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한국 페미니즘의 미래도 밝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유독 많은 자매와 직접 얼굴을 맞댔다. 세 차례에 걸친 『여자는 인질이다』 북토크 참석자들, 사일런트메가폰 전시회장에서 스쳐 지나간 ‘탈코’한 여자들, 열다북스 사람들, 함께 행사를 기획하는 ‘쉴라의 자매들’, 일본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하기 위해 일본에 같이 방문했던 한국 페미니스트들, 따듯하고도 예리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캐롤라인 노마, 그리고 곧 만나게 될 세상에서 가장 두려움 없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쉴라 제프리스까지 나에게 너무도 큰 용기가 됐다. 나도 그들에게, 또 모든 자매에게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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