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혜담 Jul 30. 2020

우리는 같은 피해자다

<여자는 인질이다> 옮긴이의 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가해자의 언어로 피해를 말해왔다. 언어는 피해를 교묘하게 은폐하거나 왜곡하거나 에로화했다. 피해는 없는 것이었다가, 부끄러운 것이었다가, 에로틱한 것도 되었다. 그래서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잖아,’ ‘난 저 여자랑은 상황은 다르지,’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라는 말이 우리가 같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진실을 가리고 우리를 분열시켰다.


나는 근친 성폭력을 당하지도 않았고,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남편에게 맞고 살지도 않는 데다, 결혼도 연애도 섹스도 하지 않으니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불굴의 의지로 탈출하고 회피한 후엔 ‘그런 여자’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가? 혹은 몸을 뜯어고치는 일부터 괴로운 섹스까지 다 내가 주체적으로 한 거니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느끼는가? 이 책은 그런 환상을 부순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남성 사회의 인질이며 남성 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우리의 피해를 다시 쓰는 책, 언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피해의 본질로 직진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페미니스트로서는 전율했지만 번역가로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영어가 되었건 한국어가 되었건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는 가해자의 언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번역가는 그 언어를 도구 삼아 싸워나가야 한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어떻게 피해를 말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번역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피해보다는 가해에 초점을 맞추자고 할 것이다. 가해를 말함으로써 피해를 드러내자고 할 것이다. 확실히 언어는 가해자를 감추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가해자가 수동태 문장 뒤로 숨어버리면 피해자는 거기 남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실제로 최근 한국 페미니즘 물결은 가해자를 지목하는 데서 동력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는 창녀, 아기는 사생아라 불리겠지.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은 없어.” 1920년대가 배경인 한 영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제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싸튀충'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온갖 새로운 이름으로 가해자를 끌어낼 때 페미니즘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거칠게 돌진했다.

.

그럼에도 피해를 말하는 일은 어쩌면 가해를 말하는 일보다도 중요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가해자가 없으면 피해자도 없다. 때리지 않는데 맞을 수는 없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정반대다. 우리가 피해자라는 인식이 존재하고서야 가해자를 찾아 나설 수 있다. 그때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조차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우리’라는 말부터가 그렇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 집단을 ‘우리’로 칭해본 적도 없었고 누가 그러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반면 ‘우리는’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점을 잊기 일쑤였다. ‘남자는’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는 ‘우리는’을 쓰고, ‘우리는’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는 ‘여자는’을 써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다르다. 역자 서문은 물론 책 전체에서 ‘우리’는 항상 여자다. 이는 저자가 의도한 바다. 저자 디 그레이엄은 <책의 목적 및 양식 설명>(쪽)에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세히 풀어낸다. (그 예리하고도 따듯한 설명을 꼭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서툴게 한 문장으로 옮기자면, ‘우리가 피해자’라는 인식은 ‘우리’라는 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가 두드러지도록 디 그레이엄, 에드나 롤링스, 로버타 릭스비 세 공저자를 일컬을 때는 거의 ‘공저자로서 우리’라고 표기했다. 또 기존의 고정 관념이나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야기할 때 습관처럼 ‘우리는’으로 운을 떼지 않으려 조심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우리’라는 말을 보면서 거기 여자가 포함되긴 하는지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피해자와 피해를 가리키는 여러 단어는 전부 진창 속에 있다. 어떤 단어는 어원부터 더럽고, 어떤 단어는 사실을 적시할 뿐이나 오염되어 있다.


‘피해자’라는 말부터 무력하고 수동적인 냄새를 풍긴다. 한자를 풀어봤자 ‘해를 입은 사람’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말인데도 그렇다. 아예 ‘생존자’라는 대안적 용어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 책은 우리의 처지를 가리킬 때 ‘피해자’ 혹은 ‘인질’이라는 용어를 선택한다. 저자가 쪽에서 설명하듯 우리가 “탁월한 생존 능력을 발휘하는가, 그래서 궁극적으로 생존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 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강간’이라는 말도 가해자 입장에서의 승리감과 정복감이 묻어나는 듯 기분 나쁘다.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압도적으로 패배해 치욕적인 상황을 ‘강간(관광) 당했다’고 묘사하기까지 한다. 고민이 됐지만 결국 ‘성폭행’ 대신 ‘강간’이라고 표현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간음할 간(姦)’이 여자(女) 셋이 모인 한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강제로 성관계를 갖는다’는 ‘강간’의 뜻풀이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강간’이 성적 폭력의 대표적인 형태기는 해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성적 폭력을 다루기에 혼동을 빚고 싶지 않았다. ‘강간’이 오염됐다면 저자가 주로 쓴 ‘레이프rape’라는 단어도 비슷하게 오염됐다. ‘강간’이나 ‘레이프’나 그럼에도 가장 간결하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저자의 판단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도 ‘레이프’와 거의 등가를 이루는 ‘강간’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페미니스트 번역가로서 간단한 원칙도 세웠다. 어원이 여성 혐오적이지 않다면 다른 단어를 찾는 데 힘을 빼지 않기로 했다. ‘생존자’나 ‘성폭행’이라는 용어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단어보다는 용법의 문제일 때 단어를 바꾸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본다.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 단어에 깃든 추악한 편견은 쉽사리 다른 단어로도 옮겨간다. 편견을 깨부수는 정면 돌파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럼 어원이 여성 혐오적이라면 어떨까? 끝까지 고심하다가 바꾼 단어가 ‘아내’다. 나는 원래 이 단어가 싫었다. 여자를 당연히 ‘집 안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안사람’이나 ‘집사람’, ‘처’, ‘와이프’, ‘마누라’ 같은 동의어도 고만고만했다. ‘여편’이 답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결혼 제도와 현실이 아무리 불평등해도 용어부터라도 ‘여편’-‘남편’처럼 동등한 무게를 지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초고를 확인한 편집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설득당해 ‘여편’을 다시 ‘아내’로 바꿨다. ‘여편’이 독해에 방해가 되며, ‘여편네’라는 멸시적 표현을 연상시키며, 이미 ‘아내 폭력’, ‘아내 학대’라는 용어를 써온 여성 운동계와 손발을 맞추는 게 유리하다는 지적이 타당하다고 봤다. 난 여전히 ‘아내’의 적절한 대체어는 ‘여편’이라고 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용어가 거슬려 책을 덮어서는 안될 만큼 이 책은 중요하다. 언젠가 개정판이 나올 즈음에는 ‘여편’이 보편화 되어 이 책에서 ‘아내’라는 표현을 지울 수 있기를 바란다. (‘여근’은 ‘여편’과 의도는 같았지만 사전 지식 없이도 ‘남근’의 상대항으로 느껴진다는 피드백을 받아 그대로 남겼다. ‘여근’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피해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는 책에서 익숙한 방식으로만 피해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는 ‘매 맞는 여자’ 혹은 ‘매 맞는 여자 증후군’이라는 익숙한 용어를 완전히 배제했다. 대신 ‘맞고 사는 여자’ 혹은 ‘맞고 사는 여자 증후군’을 대체어로 제시하고자 한다. ‘매’는 모부나 선생이 아동에게 가하는 폭력,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계도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사랑의 매’처럼 폭력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어떤 폭력도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배터batter’라는 영어 동사도 ‘구타하다’에 가깝지 조금도 ‘매’를 연상시키지 않는다. ‘배터드 우먼battered women’이 영어에서 무표적인 표현인 만큼 한국어에서 가장 귀에 익고 일상적인 표현인 ‘맞고 사는 여자’가 적합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반복되는 구타를 견디면서도 가해자와 함께 ‘살아가는’ 현상도 반영한다.


꼭 소개하고 싶었던 용어가 ‘탈혼’이다.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탈출’이며, 6장 전체를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법에 할애하고 있다. 책의 메시지를 꿰뚫는 용어가 ‘탈혼’이지만 아쉽게도 끼워 넣을 곳이 없었다. 맥락상 남자에게도 해당하는 용어를 써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 종료를 ‘이혼’이라고 표현했다.


<코르셋>을 번역하며 세운 원칙을 여기에도 적용했다.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호명할 때는 ‘여남’, ‘모부’처럼 항상 여자를 우선시했다. 사람을 얘기할 때는 ‘여성’이라고 하지 않고 ‘여자’라고 했다. 사람을 ‘여성’이라고 하면 ‘여성성’은 ‘여성’이 타고난 성질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성성’이 인질의 생존 전략이라고 보는 만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여자에게만 썼다. ‘창녀’라고 쓰지 않고 ‘포주에게 붙잡혀 성매매 되는 여자’라고 옮겼다.


피해자와 피해를 가리키는 단어가 진창 속에 있다고 앞서 말했다. 처음에는 내가 단어를 구출하러 진창 속에 뛰어드는 구원자나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5개월 동안 벅찬 원고와 씨름하며 깨달은 건, 나는 진창 속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이었다. 여기 빠진 건 우리가, 여자가 어떤 단어보다도 먼저였다. 이 더럽고 악취 나는 여성 혐오의 수렁이 우리 집이었다.


나는 우리가 다 같이 탈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누군가의 고함이 나를 깨웠듯, 어떤 자매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착한 성격을 타고나서도 아니고, 착하도록 교육받아서도 아니다. 나 혼자 탈출해서는 남성 사회가 언제든 나를 다시 진창으로 밀어 넣을 수 있어서다.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변화를 끌어내려면 우리가 모두 탈출해야만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1970년대에 “자매애는 강하다. 자매를 죽일 만큼"이라는 씁쓸한 말을 남겼다. 마냥 페미니즘에 대한 열정으로 뜨겁게 타오를 때는 몰랐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젠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네 가지 저항 요령 중 가장 어려운 게 ‘우리 편 챙기기’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남자들의 여성 혐오는 마지막 발악을 구경하듯 웃어넘기면서, 자매들과의 의견 충돌은 속이 뒤집힐 때가 많다.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여성 혐오 때문이기도 하고 믿었기에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내가 들인 노력을 누군가에게 바친다면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매들에게 바치고 싶다. 우리는 같은 피해자다. 우리의 삶은 다른 점보다도 같은 점이 많다.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의 어설픈 설교보다도 이 책이 더 훌륭한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2019년 5월 유혜담

작가의 이전글 페미니즘 번역, 자연스러움을 되묻는 불편한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