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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담 Jul 30. 2020

우리의 국적은 여자다

<'위안부'는 여자다> 옮긴이의 말

2019년 봄 나는 교토에 머무르고 있었다. 벚꽃 철이었다. 천년 고도답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조 건물 사이로 벚꽃 가지가 손을 내밀었고, 돌로 쌓은 물길 위로 꽃잎 흐르는 소리가 났다. 아름다웠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였지만 애초에 벚꽃을 보러 간 것이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기온 거리에 숙소를 잡고서 온전히 계절을 즐기려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교토의 벚꽃이 아닌 교토의 여자를 보고 있었다.


기온 거리는 넓고 곧지만, 진짜는 골목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머리를 딱딱하게 굳힌 채 종종걸음치는 ‘게이샤’의 영역이었다. 생수에 붙은 상표부터 기차역 전광판까지 ‘게이샤’ 캐릭터가 빠지지 않는 교토는 거칠게 말해 ‘게이샤’를 팔아먹고 사는 도시처럼 보였다. 그렇게 치자면 교토 전체가 ‘게이샤’의 영역이겠지만, ‘꽃을 보는 작은 길花見小路’이라는 뜻의 이곳 하나미코지는 심장부였다. 여기에서 ‘꽃’은 흔한 비유대로 식물의 생식기관이 아닌 여자를 뜻했다.


어둠이 깔리자 관광 자원인 '게이샤'를 목격하려는 인파가 모였다. 그가 곧 나타났다. 희고 붉은 칠은 그를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로 착각하도록 유도했지만, 나는 화장 너머로 나와 같은 여자의 얼굴을 읽어낼 수 있었다. 순간 내가 그고, 그가 나인 환상 속에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카메라를 목에 건 백인 남자가 그를 쫓아가며 사진을 찍자고 무례하게 옷자락을 잡아챘고, 그는 뜨내기는 받지 않는 고급 '요정'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달리 갈 곳이 있었을까. 난 그때부터 '게이샤' 제도가 성착취가 아니라는 어떤 주장과 낭만도 믿지 않게 됐다. 역하고 먹먹했다.


대로의 맞은편은 또 다른 세계였다. 내가 숙소를 잡은 곳도 기온의 북쪽이었다. 여행 가방을 끌고 큰길에서 살짝 들어갔을 뿐인데 아담한 건물마다 작은 간판 스무여 개가 붙어있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간판 하나는 업소 하나고, 방마다 어떤 여자가 매여서 성착취되고 있으리라는 걸.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번역하다가 자칫 퇴근이 늦어지면 집 앞 골목에서 몸에 딱 붙는 불편한 ‘홀복’을 입고 높은 힐에 올라탄 여자들이 배 나온 직장인 남자를 배웅하고 있는 장면을 봐야 했다.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앞만 보고 걸었지만, 걷는 내내 우리가 얼마나 한 끗 차이인지를 생각했다. 나도 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쪽은 여행객과 소수 엘리트 남자를 위해 박제된 과거의 성착취라면, 반대쪽은 시대에 발맞춘 현대적 성착취가 자리 잡은 셈이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현대의 여자 청소년들을, 몇백 년 전부터 여자들이 죽어 나간 한이 서린 제도로 밀어 넣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떻게 그 위에 관광 산업을 쌓아 올리고,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전통인양 ‘게이샤’ 귀이개 따위를 팔아치운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현대적 성착취라고 뭐가 다를까. 우직하게 보존했건 약삭빠르게 모습을 바꿨건 성착취라는 유구한 제도는 현재 살아 숨 쉬는 여자의 생생한 고통을 원료로 돌아가고 있었다.



교토는 켜켜이 쌓인 여성 혐오의 지층이었고, 알게 될수록 숨이 막혔다. 마침 같은 시기 교토에 머무르던 캐럴라인 노마가 아니었다면 그 봄은 고통으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기온을 내려다보는 야사카 신사 앞에서 캐럴라인을 처음 만난 날, 나는 내가 교토에서 봤던 것들을 쏟아냈다. 있지, 개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가 예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문득 건너편 건물이 뭔지 궁금해져서 봤어. 양복 입은 남자들이 기모노 입은 여자를 한 명씩 끼고 있는 거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유리창을 활짝 이쪽으로 향하고, 내가 보던 그 꽃을 감상하고 있는 거야. 여자를 꽃 취급하더니만 그들에겐 벚꽃 철이 성착취 제철이라도 되는 걸까.……어제는 집 앞 디저트 집에 갔어. 카페도 오후 6시에 닫곤 하는 교토에서 밤늦게 영업해서 신기했는데 손님이 다들 여남 쌍쌍인 거야. 여자는 어리고 남자는 나이가 많았어. 알고 보니 성착취 업소에서 ‘데이트’로 데리고 나온 거였지. 한 남자는 핸드폰으로 포르노 영상을 켜서 여자 눈앞에 들이밀고 있었어.……정말 괴로운 건 여기 사람들도, 여기를 꽉 채운 관광객들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저 여자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나 봐. 나는 눈에서 피가 나고 귀가 찢어지는 기분인데. 이게…. 말이 돼? 캐럴라인은 이미 알고 있었을 사실들도 처음 듣는 양 함께 분노하고 맞장구쳐주었고,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따듯하고 자매애 넘치는 캐럴라인은 내가 교토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 페미니스트들을 초청해 일본의 반포르노 반성폭력 단체 PAPS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PAPS 사람들은 우리를 ‘일본 최대의 성착취 거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토비타 신치를 보여주겠다고 데려갔다. 모르긴 몰라도 PAPS의 페미니스트들도 캐럴라인이 내게 해준 것처럼 이건 정말 이상하다고 공감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는 이 풍경의 충격과 참혹함을 누군가가 같은 눈으로 봐준다는 것, 거기서 용기와 변화가 피어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야쿠자가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는 토비타 신치 성착취 집결지는 잘 정비된 노점상 거리처럼 멀끔해서 더 끔찍했다. 앞이 뻥 뚫린 업소 안 분홍빛 조명 아래 ‘팔리고 있는’ 여자들은 웨딩드레스나 치파오, 기모노처럼 남자의 성적 페티시를 자극하는 온갖 복장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포즈를 취했다. 자동차를 타고 각 업소를 스치듯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남자도 있었다. 어떤 한국 남자가 “야, 천국이야, 천국”이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게 그 지옥도를 완성했다. 거기서는 국적도 언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토에서 지내며 막연히 느껴오던 사실이 토비타 신치에서 분명해졌다.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쪽은, 나의 운명과 뿌리부터 연결된 쪽은 ‘팔리고 있는’ 여자였지 ‘사러 온’ 남자가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에서 전범 국가인 일본 여자의 고통을 왜 이렇게 공들여 묘사하는지 마음이 불편하다면, 계속 읽어보기를 바란다. 기온 골목의 풍경 위에 토비타 신치의 풍경을 겹치고, 그 위에 이 책을 올려보자. 19세기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고깃배 타고 해외로 팔려나간 여자들, 부푼 꿈을 가지고 상경하자마자 인력거꾼의 세 치 혀에 속아 넘어가 허상의 빚에 메여야 했던 여자들, 어린 나이에 ‘게이샤’ 업소에 팔려 아는 세계라곤 성착취밖에 없던 여자들, 전쟁 말엽까지도 어두컴컴한 오키나와 동굴 속에서 성착취 당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반투명한 종이 위에 그려서 포개놓는다고 해보자.


이제 이 종이 더미 위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겠다. 한국에서 자라며 ‘위안부’ 문제는 항상 마음 한편에 숙제처럼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남들 아는 만큼만 알았다. 페미니스트로 각성하고 나서도 딱히 새로 공부하거나 새로운 각도로 보지 못하다 번역을 맡게 된 후에야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을 읽었다. 1991년 8월 14일 한국 거주자로는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 운동가는 위안소로 몰래 들어온 조선인 은전 장수에게 데리고 나가 달라고 말하지만, 남자는 자기 욕구만 채운 채 나가려 한다.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남자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대만으로 끌려가 동굴 속 해군부대 위안소에서 성착취 당한 진경팽 운동가는 “남자들에게 물려서 지금도 남자가 짐승 같이 보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낯선 땅 남태평양 팔라우에 묶여있었던 강무자 운동가는 딸이 없는 게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딸이라면 내가 외로울 때 심정을 이해해줄 것이다. 아들이라면 이해를 못 할 것 같다.” 여자라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은 아버지, 속여서 끌고 간 인신매매 업자, 강간하고 협박하고 상해를 가한 군인들, 육체노동과 감정 노동을 착취한 남편까지 증언자들의 인생은 남자가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굴곡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대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질 이야기를 하나만 더 놓고 마치겠다. 20여 년 동안 성착취 산업에 매여있다 탈출한 반성착취 활동가 봄날은 작년 11월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훌륭하고 용감한 책을 냈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던 중 봄날의 책을 읽었는데, 위안소와 봄날이 겪은 성착취 업소는 시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비슷했다. 여자를 선불금으로 옭아매고, 비싼 옷이나 화장품이나 장신구를 사게 만들어 빚을 불리고, 익숙할 틈 없이 다른 업소, 업종, 지역으로 팔아넘기고, 아파도 쉴 수 없게 하고, 여자들을 차등 대우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끝내 빈손과 아픈 몸으로 업소를 떠나게 만드는 포주의 전략은 그 효과가 증명된바 어디선가 전수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겹쳐진 수십 수백 장의 종이들을 보자. 종이 한 장은 여자 하나가 일궈낸 삶이다. 주어진 조건 아래 살아남고 싶어서, 더 잘살고 싶어서 궁리했던 처절한 결과다. 나라와 사회가 한 여자가 벼랑에 서도록 조장하고 방치하고 때로는 이득을 취하기까지 했다는 눈 돌릴 수 없는 범죄 증거다. 어떤 시대냐, 어떤 민족이냐, 어떤 여자냐, 어떤 제도냐가 종이의 무게로 흐릿해지고 나면 하나의 그림이 오롯이 떠오를 것이다. 이 그림을, 꼭 같이 보고 싶었다. 나의 말에는 설득되지 않더라도 ‘위안부’도 여자였다는 어쩌면 당연한 명제를 입증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 여러분도 같은 그림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 페미니즘 물결에 주목해 온 독자라면 지금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이 있을지 모르겠다. “여자인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여자인 나는 조국을 원치 않는다. 여자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80여 년 전 『3기니』에서 외친 말은 오늘날 한국 페미니스트에게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디지털 성폭력과 편파 판결에 분노한 여자들 수만 명이 운집해도 이 나라 대통령은 고작 “여성들의 원한”으로 치부했을 때, 존경해온 남자 위인들이 아내를 때리고 성착취 업소에 방문하고 여자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나라 사법부가 남자에게 너무 관대한 나머지 제발 가해자를 다른 나라로 보내 달라고 읍소해야 했을 때, 우리는 고아가 된 것처럼 상실감에 시달리며 울프와 같은 선언을 했다.


그러나 나는 교토에서 여러 풍경을 보면서, 일본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면서, 캐럴라인과 친구가 되고 또 이 훌륭한 책을 읽고 번역하게 되면서, 조금은 결이 다른 문장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어 번역서의 제목으로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우리의 국적은 여자다’라는 말을. 아버지 국가가 우리를 돌보고 책임지고 보호해줄 의무를 저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평생 울타리 하나 없는 채로 죽으란 법은 없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여자라는 정체성은 여태 족쇄와 낙인으로 작용했지만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기도 하다. 여자인 나는 모국을 원한다. 우리 불쌍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인질로 잡혀 차마 우리를 돌봐주지 못한다면, 자매들과 함께 세울 나라를 원한다. 우리 땅과 우리 언어를, 우리 법과 우리 지도자를 원하고, 우리가 여자라고 말할 때 자부심과 동포애가 차오르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나라는 여자가 머무르는 모든 육지와 바다다.     





올해 3월 캐럴라인이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 공식 일정이 없는 개인적인 방문이었다. 난 그 소식을 듣자마자 캐럴라인과 봄날을 꼭 연결해주고 싶었다. 둘은 나이도 한참 어리고 경험도 모자란 나를 감사하게도 친구처럼 대해주어서, 한 친구를 다른 친구에게 소개하듯 가볍게 자리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의 반성착취 학자가, 성착취 생존자로서는 한국 최초로 수기를 책으로 펴낸 반성착취 활동가를 만난다는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나는 통역자이자 그 자리의 유일한 청중으로서 둘 사이에서 오간 귀중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둘은 오래전 헤어진 자매처럼 만나자마자 어색할 짬도 없이 열띤 이야기를 나눴고 7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흘러갔다.


그 자리에서 오간 대화를 다 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몇 얘기만큼은 기록하고 싶다. 캐롤라인에 따르면 성착취가 '합법'인 호주에서 성착취 당하는 여자 절반 가까이가 아시아 여자다. 호주 정부는 이들을 '이주 성 노동자'로 보지 피해자로는 보지 않는다. 자국민 백인 여자를 보호하는 겹겹의 법적 장치는 이들에게까지 가닿지 않는다. 호주 남자들은 말이 안 통하는 아시아 여자에게는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듯 성착취의 기본 규칙마저 어긴다. 여자가 경찰에 피해를 호소해도 경찰은 아시아 여자가 강간과 폭행을 당할 리가 없는 것처럼 콧방귀를 뀐다.


그런 피해자 중에는 한국 여자도 있다. 한국에서 성착취 당하다 선불금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하면 포주는 눈 딱 감고 열심히 하면 빚을 다 갚는다는 감언이설로 여자를 다른 나라에 팔아넘긴다. 이 구조는 과거 일본인 여자가 '위안소'에 유입됐던 역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편 한국 남자들은 현재도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 '예술흥행(E-6) 비자'로 들어온 여자들을 성착취한다. 이 국제적인 인신매매 구조 속에서 우리의 여권 색깔이 아니라 우리의 성별이 우리 운명을 결정 짓는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왜 상업적 성착취는 가만히 놔두냐는 봄날의 일갈도 정신을 깨우는 듯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할 때 가장 먼저 도입시킨 법률 중 하나가 합법적 성착취 제도인 ‘공창제’였다. 일제가 착안한 공적, 강제적 성병 검사라는 틀은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를 거쳐 최근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다. 식민지배가 남긴 이 가장 악독한 유산을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 민족주의자는 없다.


봄날은 탈성착취 이후 이런 역사를 공부해왔고, 이 책이 헌정된 단체이기도 한 뭉치에서 같은 탈성착취 생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개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존자들은 자신의 성착취 경험을 재해석할 뿐 아니라, 성착취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다고도 했다. 나는 이 재해석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영원히 숭숭 구멍이 뚫린 채이리라고 믿는다. 성착취 산업에 메여있다 '위안소'로 재인신매매된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 책이 한국에 꼭 필요한 이유도 같다. 우리가 그들을 빼놓고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위안부' 문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착취라는 범세계적이고 초역사적인 범죄 앞에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자리에서, 또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좌절보다는 연대감과 효능감을 더 크게 느꼈다. 우리의 국적이 여자라면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는 우리의 억압 경험이다. 캐럴라인과 봄날은 많은 맥락 설명 없이도, 때로는 단어 한두 마디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언어 차이를 뛰어넘어 성착취가 전 세계 여자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분명 나 같은 번역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그 의무를 차라리 기쁘게 받아들인다. 

    


모든 텍스트는 나름의 어려움을 가지지만 이 책을 옮기면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힘들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한국어나 일본어로 쓰인 글을 영어로 인용한 책이다 보니 한국어와 일본어의 가까움을 이점으로 살리기도 쉽지 않았고, 언어를 여러 번 갈아타느라 뉘앙스나 맥락이 상실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역사적 배경부터 군사 용어까지 공부할 것도 많았다. 그래도 내가 수시로 던지는 질문을 캐럴라인이 신속하게 답변해주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도움이 됐다.


정말 어려웠던 건 위의 경험과 생각을 번역에 반영하려는 고민이었다. 번역을 하면서 기본적으로는 가독성보다도 피해자의 경험을 왜곡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것을 더 중시했다. 이런 책에서라면 읽을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미리 경고하자면 이 책에는 따옴표가 많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거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입에 담기 싫은 단어들을 써야 할 때는 따옴표를 쳤다. 성착취 같은 범죄가 ‘합법’이라니, ‘성노동’이라니, 어떤 문장은 조사만 빼고 다 따옴표를 붙일 지경이었다. 정 많다 싶을 때도 남자들이 성착취를 폭력이 아닌 어떤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위안부’, ‘카페’, ‘음식점’, ‘공창제,’ ‘홍등가’ 같은 완곡어법만은 절대 따옴표를 빼지 않았다.


내가 번역한 첫 책 <코르셋: 아름다움과 여성혐오>에서 나는 ‘성매매’라는 용어를 울며 겨자 먹기로 썼고, 옮긴이의 말에 “‘페이강간’이나 ‘성착취’ 등도 생각해보았으나 혼동 없이, 가독성 있게 글에 녹여내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했다”라는 변명을 남겼다. 이 책에서 ‘성착취’ 혹은 ‘상업적 성착취’라고 쓸 수 있었던 건 내가 페미니스트 번역가로서 성장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추적단 불꽃'과 '프로젝트 리셋', 'eNd'를 비롯해 한국의 온라인 기반 페미니스트들의 공이 크다. 이들이 텔레그램 상의 범죄를 성착취로 호명했기 때문에 성착취가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에 당연하게 등장하는 한국어 단어로 자리매김했고, 나도 거리낌 없이 ‘성매매’ 대신 성착취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성착취가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운동성 있는 단어인지 확립할 필요가 있다. 올해 4월 12일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Nd’는 여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해 습득한 모멸적인 사진과 영상을 텔레그램 등의 메신저에서 공유하며 수익을 올린 일련의 사건을 성착취 대신 ‘성범죄’나 ‘성폭력’으로 불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착취’는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할 때 쓰는 말이라 “은연중에 여성의 성은 사고팔아도 되는 물품 또는 거래되어도 되는 마땅한 것이라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eNd’ 측은 하루 만에 사과문을 올리며 이를 물렀지만, 나에게는 성착취라고 써야 하는 근거를 첨예하게 다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성매매’라고 할 때 연상되는 ‘룸살롱’이나 ‘방석집’ 같은 업소에서 벌어지는 일과, 소위 ‘n번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얼핏 달라 보인다. 예를 들어 ‘n번방’ 피해자는 일부를 제외하고 가해자와 대면조차 하지 않았으며, 신상이 밝혀질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어떤 금전도 받지 않고 계속 영상을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룸살롱’ 업소의 피해자는 자기 ‘선택’으로 가해자와 일종의 계약을 맺고 돈을 ‘정산’ 받는다는 인식에 사로잡히면, 그래서 ‘n번방’에서 ‘노예’라고 불렸던 여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성범죄’나 ‘성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정말 중요한 공통점을 놓치게 된다. (실제로는 반성착취 진영의 여러 활동과 연구와 저술이 증명하듯 어떤 업소에서도 ‘선택’은 선택이 아니며, ‘정산’은 정산이 아니다.)


‘성범죄’라는 단어는 법규에 어긋난 일, 공권력으로 처벌해 마땅한 일을 지적할 때 쓴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는 주먹으로 상대를 때리는 행위만 폭력이 아니라, 상대의 몸을 원치 않게 침해하는 행위도 폭력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쓴다. 그런 의미에서 ‘n번방’ 사건도 온갖 형태의 업소들도 ‘성범죄’이자 ‘성폭력’이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조주빈, 문형욱, 강훈, 이원호 외 여러 ‘n번방’ 가담자와 조력자는 법을 어겼고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포주다. 남자들끼리 여자라는 ‘유흥’을 누리도록 판을 깔아주는 자들(거의 항상 남자)은 피해자 뒤에 숨어 사회적 비난과 처벌은 피하면서도 금전적 이득을 누려왔다. 돈이 어떻게 오가는지 똑바로 주시해 보면 이 ‘거래’에서 여자는 재주를 부리는 곰처럼, 젖을 짜이는 소처럼 포주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만 한다. 성착취라고 부르면 이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면서, 어쩌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일 포주에게 마침내 화살이 돌아가게 된다.

‘eNd’ 측의 지적대로 성착취라는 단어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나도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이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사전 뜻이 한국어 사용자의 용례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아동 착취’라는 말에 아동의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기만 하면 괜찮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또한 페미니스트로서 기존과는 다른 표현을 만들어 쓸 때 우리 목표는 영원히 튼튼할 집을 짓는 것이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바퀴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매매’는 여자의 몸에 시장 논리를 적용하게 된다는 면에서 문제적이지만, ‘성매매’가 ‘매춘’을 대체했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성착취라는 표현이 열어줄 세상에서 다음을 도모하기로 한다.


번역하며 갈림길에 설 때는 「근절주의적 개념어들」 꼭지에서 저자가 밝힌 의도를 나침반으로 삼았다. 시대성이 느껴지는 용어를 과감히 버리고, 오늘날 반성착취 운동에서 민간 성착취를 설명할 때 쓰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예를 들어 ‘유곽’이라는 말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훅 끼쳐올지는 몰라도 성착취 집결지라고 써야 같이 따라오는 불쾌한 낭만화를 끊어낼 수 있었다. ‘카페’나 ‘요정’, ‘료칸’에는 꼭 업소를 붙여서 성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임을 명시했다. 업소에서 ‘일한다’라거나 ‘종사한다’라고 쓰는 대신 ‘매여있다’라거나 ‘억류됐다’라거나 ‘성착취된다’라고 묘사했고, 여자가 성착취 산업에 매이게 되는 모든 과정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신매매’라고 했다. ‘구매자’ 대신 성착취남을, ‘성 사업가’ 대신 포주를 썼다.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이 항상 가장 조심스럽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대표에 대해 용감히 문제를 제기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운동가는 올해 5월 25일 기자회견에서 “내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더러운 성노예 소리를 왜 하냐고 하니까 미국 사람 들으라고” 대답했다는 그의 증언은 과연 기존 ‘위안부’ 정의 운동이 피해자를 운동의 지도자이자 함께 방향을 설정하는 동지로 생각해왔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조차 떳떳하지 못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갖다 댄들 피해의 진실과 피해자의 존엄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매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책 출간을 앞둔 지금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언어가 피해자에게도 설득력이 있을지 심판대 앞에 선 기분이다.


보도에 따르면 2019년 전국적 공분을 산 소위 ‘버닝썬 게이트’의 주요 인물들은 단톡방에서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가진 여자를 모욕의 의미를 담아 “위안부급”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성노예’라는 말은 어찌나 포르노화 되었는지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조차 자기 입으로 피해자를 노예라 불렀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위안부’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번역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일본군 성착취나 현재의 민간 성착취나 여자의 자유를 억압하고 운신을 제한해 이득을 취하는 제도임을 지적하려면 ‘성노예제’라는 개념도 필요했다. 큰 길이 앞뒤로 막히니 돌아가더라도 샛길을 찾아야 했다.


피해를 겪은 여자를 짧게 ‘위안부’나 ‘성노예’로 부르지 않았다. 되도록 말이 길어지더라도 억류된 여자, 인신매매된 여자, 성착취 제도에 묶인 여자, 성착취당했던 여자, 잡혀 온 여자처럼 써서, 피해가 이들을 수식할지라도 정의하지는 않도록 주의했다. 여자라는 정체성이 이들에게 피해를 불러왔으니 이를 중심으로 문장을 꾸리는 게 옳았다. 간결함이 필요해서 ‘위안부’ 피해자/생존자 혹은 성노예제 피해자/생존자라고 쓸 때는 ‘위안부’라고 불리고 ‘성노예’ 취급을 받은 것 자체가 피해라는 의미를 담는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겪는 참혹한 폭력을 남자의 관점에서 ‘위안’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위안소’ 제도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중일/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군이 운용한 ‘위안소’라는 이름의 성착취 업소로 끌려갔던 한국 여자, 그리고 ‘공창제’라는 이름의 ‘합법’ 성착취 제도에 묶였던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여자를 넘어, 현재까지도 가지각색의 성착취 업소에서 고통받는 전 세계 여자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 그래서 나도 피해의 우열을 가리거나 특정 종류의 피해자를 밀어내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유의했다. 이 책은 여자에게 민간 업소가 가한 피해와 ‘위안소’가 가한 피해가 둘 다 성착취라고 본다. 그런 통찰을 번역에 적용하기 위해서 민간 업소에서 ‘위안소’로 인신매매되는 것을 ‘재인신매매’라고 표현했으며, ‘성착취 선경험’이라는 말을 만들어 민간 업소에서 ‘위안소’로 재인신매매된 여자의 경험을 함축했다.


이런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던 건 저자 캐럴라인 노마가 래디컬 페미니즘적 번역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노마는 이 책에서 보듯 날카롭고도 따듯한 시선을 가진 반성착취 페미니즘 학자임과 동시에, 대학에서 번역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한국에 짧게 머무르는 동안 한국어를 배우기도 한 노마는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벌어지는 맥락도 잘 이해하고 있다. 노마는 감사하게도 나를 신뢰하고 나의 번역 방향을 응원해주었다. 단어 하나까지도 이 책에 담긴 충격적이리만큼 명쾌한 통찰을 반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위와 같은 선택을 했음을 여기서 분명히 밝혀둔다.



교토와 토비타 신치에서 내가 목격한 여자들을 비롯해 이 순간에도 성착취 산업에 억류되어 있을 여자들을, 어쩌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지도 못할 여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은 ‘그런’ 여자와는 다르다고 증명해야할 위치에 놓인 여자들을 생각한다. 여자라는 국적을 그저 벗어던지고 싶은 여자들을 생각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 개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여러 소중한 랟펨 친구들을 생각한다. 번역자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저자이자 페미니스트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동지인 캐럴라인과, 너무도 큰 버팀목이 되어준 봄날을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동포애로 이 책을 번역했다. 민망할 정도로 길어진 이 역자 서문을 이렇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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