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I've married my wife
짧지만 금쪽같았던 워킹홀리데이와 세계여행들을 1년간 마치고 다시 한국생활로 돌아온 해는 2014년이었습니다. 1년 전이나 후나,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에서의 삶은 사실상 '무한경쟁' 단 한 단어로 요약되는 거 같아요. 세계 속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를 발견했고,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던 지난날들은 우습게도 언제 그랬었냐는 냥 점점 빛바래졌고 어느덧 다시 원래의 '한국적인 삶'으로 빠르게 물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저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졸업과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약속이 있었어요. 바로 '한국의 사는 외국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었죠. 지난 워홀과 세계여행 중에서 세계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똑같이 베풀고 싶었어요. 더불어 필사적으로 생존을 위해 공부했던 영어도 계속 실력을 쌓아가고 싶었던 욕심도 남아있었기에 외국인을 만나기 위한 방법을 하나 둘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과 어울리는 건 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했어요.
외국인과 어울리는 게 쉽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존재한다는 점이죠.
제가 재학했던 대학교내에서는 교환학생과 재학생들을 매칭 하여 그들이 빠르게 적을 할 수 있는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영어카페, 언어교환 목적을 다룬 Meetup, Friendstalk, 펜팔사이트와 같은 다국적 인터넷 커뮤니티와 어플들이 활발하게 운영되었으며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주거나 세계문화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기업, 정부 봉사 프로그램들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시간 나는 대로 적극 참여했던 동시에 더 나아가 명동 호텔 리셉션 데스크에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찾아온 외국인들의 체크인을 돕고, 관광지를 소개하는 일을 해보기도 했고 길을 걷다가 휴대폰 지도를 보며 기웃거리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적극적으로 안내해주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 한 해 동안만큼은 한국인보다 외국인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날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한편, 외국인과 외국인들과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요. 지금에서야 제가 깨달은 점이 한 가지는 제 스스로 그들과 관계를 맺는데 그다지 진실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길안내를 하거나 간단한 말동무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한국인인 점을 강조해서 그들에게 무한정 친절을 베풀고 잘해주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한 친절함의 내막에는 외국인들이 분명 '한국 생활을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며, '한국인 친구의 도움이 필요로 할 것이다'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접근을 했기에 그들로부터 '보상심리'를 받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만나본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국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중에서는 한국생활이 그다지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고, 한국어 없이 영어만으로 십수 년을 살아가도 별다른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외국인도 많았어요.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을 이해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오직 제가 생각하는 시선 만으로 그들을 바라본 결과 한국에서의 '외국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며 살아온 거 같습니다. 만약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들을 보통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게 가장 바른 방법 같아요. (이 이야기는 다음 글을 통해 이야기해볼 예정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게 된 계기는 제가 고민했던 씨앗에서 비롯되었어요. 저희 둘이 처음 만난 건 종로였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 제가 광화문-인사동 일대의 길잡이를 자처하며 친해질 수 있었어요. 이후 영어에 능숙했지만 한국어에 미숙했던 그녀와 영어공부에 의지를 불태웠던 저는 지속적으로 언어교환을 통해 만나면서 연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저는 한국어 공부로 힘들어했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척 아팠었어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쏟아도 생각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 게 언어였던 거 같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습이 꼭 캐나다에서의 제 모습을 보는 거 같았거든요. 제가 늘 생각했던 '도움이 필요한 외국인'이라는 점에 많이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게 감정들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하다 보니 서로 사랑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연인관계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아내는 당시에 제가 이런 생각 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콧방귀를 뀔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언어를 교환했던 당시에 저는 엄청 사납게 한국어를 가르쳤었거든요. "법학과 해봐 법학과. 틀렸어!", "발음이 왜 이러니", "더 노력해야 돼", "더 완벽하게 할 수 없니", "마침표와 쉼표 구분해야지" 등 완전 스파르타 식으로 한국어를 가르쳤거든요. 저 때문에 아내는 당시에 참 많이 울기도 했어요. 그러나 제가 한국어 악마조교가 되어 언어를 알려줬던 배경에는 한국어를 잘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 바람이 있었음을 고백해 봅니다. 방법이 어찌 되든 그녀는 저는 결혼에 골인했고, 완벽하게 한국 패치가 돼서 이제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