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신기한 날이다.
365일 일 년 중 단 하루에 불과한 날이지만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이 날을 위해 지금까지 일 년을 달려온 듯 들떠있다.
감성의 연말 결산이라 표현해도 괜찮을 듯하다.
거리와 카페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조형물과
점멸을 교차로 반복하는 따뜻한 빛의 조명을 보면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이 한 데 섞인
크리스마스의 마력에 은은히 취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한파라는 고약한 녀석을 대동하긴 했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특유의 분위기가 더 신비해진 느낌이다.
SNS를 보면 온통 내리는 눈에 대한 기쁨과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대중적 정서에 반감을 가지는 힙스터여서는 아니고
그냥 우는 아이 출신이기 때문이다.
어릴 땐 참 우는 일도 많았다.
싸워서도 울고 화나서도 울고 따돌림당해서 울고
병실에서 외로워서도 울고 오세암 보고나서 울고
재밌게 보던 만화가 완결이 나서 울고 기쁠때도 울었다.
어째 감정의 분출을 우는 걸로 밖에 못 했던 것 같다.
나는 진지하게 내가 선물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는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가 그거 한 번 울었다고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게 야속해서 또 울었다.
눈물의 연쇄인 셈이다.
지금은 안구가 건조해 인공 눈물에 의존하는 어른이 됐다.
눈이 와도 전혀 기쁘지 않고 가게 앞을 쓸 생각에 짜증부터 나는 어른이다.
마감 하고 집에 가는 길에 구세군 자선냄비가 있었다.
위 아래로 흔들리는 노란색의 종 소리를 보며 추억이 생각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함께 장식한 트리 맨 위에 단 노란 별.
내 크리스마스는 빨간색도, 초록색도, 하얀색도 아닌 노란색이었다.
그 별을 보며 올해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오길 소망했고
다음 날 머리맡에 놓인 유희왕 카드를 봤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하지만 산타 할아버지가 바빠서 오지 못해 대신 줬다는 부모님의 고백에
또 울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산타를 믿는다.
정확히는, 산타의 필요성을 믿는다.
우는 아이도 웅크린 아이도 상처받은 아이도
저마다의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