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마음들에 대해
유년 시절 명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비슷하다. 할머니 작은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시고 엄마의 부재를 채워보려 그 옆에서 서성이는 꼬마 아이 한 명. 어른들의 헤어짐으로 지게 된 책임과 눈치 보던 마음들은 그 아이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당시에는 앞에 놓인 상황들이 지독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작은 어머니를 도우라 말하던 작은아버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작은어머니도 어린 나이에 시집와 맏며느리 일까지 도맡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담이 컸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매번 같은 명절이라지만 달달한 시간도 있었다. 친정으로 돌아가는 작은어머니와 교차해 시댁에 다녀온 고모가 오시는 날. 엄마와 아빠가 없는 명절을 보낸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모가 오실 때면 그 아이는 부엌에 서성일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곤 했다. 원래라면 식사시간이 다가올 때쯤 수저라도 두어야 하나 반찬이라도 가져다 날라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일쑤였고 식사가 끝나고 나면 눈치를 보다 작은어머니 옆에 슬쩍 다가가 설거지를 도와했기에 같은 마음으로 도우려 식사시간에 맞춰 부엌에 갈 때면 ‘저리 가 고모가 할 거야, 고모는 이런 거 좋아해.’ 라며 수저도 못 놓게 하곤 하셨다. 동생들은 다 누워 쉬고 있는데 어린 마음에 사실 그 일들이 얼마나 하기 싫던지 돕겠다는 말을 한 번 더 할 수 있었지만 입을 가만 다물고 방에 가서 누워있고는 했다.
같은 명절이 반복되고 독립을 하게 되어 성인이 된 후로는 한동안 명절에 가지 못했다. 시간을 쪼개면 갈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없는 명절, 가면 도와야 하는 일들이 그때는 전부 우울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어느 가을 할머니가 그리워하셔서 우울함은 접어두자 굳게 마음먹고 시골로 향했던 해다. 아직도 그날의 날씨는 잊히지가 않는다. 몇 년 사이 동생들은 전처럼 장난치기 어색할 만큼 커 있었고, 동생들의 젊은 엄마 아빠로 느껴지던 작은아버지와 고모는 이제 그 어렸던 아이가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분위기를 내고 계셨다. 여느 때와 같이 식사 시간이 다가와 습관처럼 일을 돕겠다 했고 언제나처럼 부엌에서 내보내며 마다하시기에 그날은 늘 속에서만 맴돌던 질문을 했다. “고모는 왜 나 일 안 시켜?” 그리고 그 물음에 돌아왔던 대답은 그날 저녁, 밥 한술을 못 넘기도록 나를 울렸다.
“너도 엄마 있는 것처럼 가서 놀아 규언아”
사실 때로는 같은 가족이기에 부럽지 않았다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고모의 아이들 작은아버지의 아이들은 다 거실에서 아이다운 명절을 보낼 때 하기 싫은 일에 몸을 일으키거나 서성이며 늘 혼자라고 생각했으니까. 혼자 노력하고 있다고, 아무도 눈치 보는 마음 따위는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동생들은 너무 어렸고, 아직 명절 풍습이 남아있는 집안에서 부엌일을 도울 수 있는 여자라고는 내가 유일했기에 몇 번이고 미안해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작은어머니 몰래 용돈을 더 쥐어주곤 하던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시댁에서도 종일 일을 하고 와서는 아직 어린애가 일을 돕다 엄마를 떠올릴까 묵묵히 밀린 빨래와 청소, 밥 차리는 일을 해주고 가던 고모의 마음을. 모르는 척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린 내게 상처가 될까 함부로 위로조차 안 했던 가족들의 마음을.
그 어린 아이를 위해 뒤에서 마음 쓰고 있던 가족들의 마음을 알고 나면 나야말로 아픔에 젖어 자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어리고 못난 아이였음을 깨닫는다.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다시 되돌아본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캄캄한 시간과 기억들은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는 장면으로 바뀐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마음과 사랑은 자꾸만 날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