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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ev May 25. 2020

어린왕자와 진 와일더

The Little Prince and Gene Wilder

https://youtu.be/SVi3-PrQ0pY

Pure Imagination - 초콜릿 천국 (1971)

1971년의 초콜릿 천국을 봤다면, Pure Imagination을 부르는 진 와일더를 봤다면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은 소름 끼치는, 절대 친절하지 않는 진 와일더의 윌리 웡카는 그 기묘함 자체가 매력이다.


와일더의 웡카 연기가 강렬할 정도로 인상적이라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았다. 그 중에 내가 아는 익숙한 이름은 어린 왕자. 1974년 뮤지컬 영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영화인 사랑은 비를 타고의 감독 스탠리 도넌이 메가폰을 잡았다. 웡카로 와일더에게 흥미를 가진 나는 어린 왕자를 찾아 보았다. 진 와일더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 역할을 했고 러닝타임의 끝에 다다라서야 등장한다. 역시나 여기서도 근사한 노래를 부르는데 넘버의 이름은 바로 Cloer And Closer And Closer다.


https://youtu.be/NS5e9DW5QxM

Closer and Closer and Closer - 어린왕자 (1974)

서서히 친해지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관계를 하나의 곡으로 요약했는데 나는 여기서 진 와일더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여우로 분장한 진 와일더는 혼자서 미친듯이 어린 왕자 주변을 뛰어다니다가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어린 왕자의 작은 손에 제 손을 올려놓는다. 결코 쉽게 다가간 것이 아니고 그의 조심스런 접촉은 어린 왕자가 뺨을 살짝 어루만져주는 것으로 보답 받는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여우와 어린 왕자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숲 속을 뛰어다니며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인연도 끝이 찾아온다. 이때 진 와일더는 물기 있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울음이 날 것 같아."


어린 왕자는 그의 이름대로 아직 어리숙해서 위로 하는 방법을 모른다. 너무 어려 이별의 슬픔을 모르는 탓인지 어린왕자는 다소 냉정하게 말한다.

"슬프게 하고 싶지 않지만 길들여달라고 한 거 너였어. 너한테 해준게 없으니 시간만 낭비한 셈이야."


눈동자 위로 서글픔이 빛나는데도 여우는 다정하게 말한다.

"아니야. 네가 나한테 낭비한 시간은 내게 자부심을 심어줬어."


그리고 여우는 떠나는 어린 왕자에게 다급히 달려가 종이를 내민다. 이별의 선물로 그는 자신만의 비밀을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종이에 소중히 적어 건네는 비밀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나였다. 곧 이어 어린 왕자와 꼭 끌어안는 여우를 보며,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칼이 생각난다는 갈대밭(이제 그 갈대밭은 여우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비밀을 속삭이는 여우를 보며 계속 눈물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안 보이니까."


그 대사를 끝으로 더 이상 진 와일더는 나오지 않는다. 분량만 두고 보자면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작은 부분 때문에 이 영화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다. 당연히 영화가 주는 울림 때문에 눈물이 흘렀지만 진 와일더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와 여우는 다시 만날 수 없었으니까. 우리가 이제 진 와일더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진 와일더는 2016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에도 난 그런 배우가 있는줄 몰랐다. 집에 있는 무비스타 501 이라는 책에 진 와일더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도, 몇번이고 읽었던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이라는 책에 진 와일더의 영화가 세 편이나 실려 있는데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 이별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랑하자마자 이별하게 되는 심정은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 


어린 왕자를 시작으로 진 와일더의 영화를 네편 연달아 보았다. 영 프랑켄슈타인, 프로듀서, 블레이징 새들스, 실버 스트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제외하면 세편 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들이다. 실버 스트릭은 70년대 영화답지 않은 세련된 스릴이 있고 프로듀서는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상식이 붕괴되는 듯한 코미디다. 블레이징 새들스의 마지막 장면 또한 예측불허하고 영 프랑켄슈타인의 말장난은 아직도 낄낄거리며 보기 좋다. 그리고 그 영화 네편 속에서 항상 자신의 역할을 맡은 바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진 와일더가 있다. 코미디 전문 배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처음인데 영화 마지막에 항상 웃으며 끝낼 수 있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 웃고나면 이제는 필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그가 그리워 또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그저 슬퍼하는 방식으로 애도하지는 않는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의 죽음으로 다시 장미에게 돌아갔듯 모든 영혼들은 돌아갈 각자의 행성이 있을 것이다. 진 와일더도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행성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의 행성은 분명 재밌고 웃음이 많은 곳일 것이다. 


그를 알고 난 뒤 깊은 사랑을 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시간은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길들인 대상에게는 책임감이 생긴다. 길들인 순간부터 여우는 그냥 여우가 아니다. 어린왕자가 길들였던 자신의 장미를 하나 뿐인 장미로 여겼듯이 내게도 진 와일더는 그저 영화 배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우에게 아무 의미 없던 밀밭이 어린왕자를 추억하는 것처럼 아마 나도 어린왕자를 보면 진 와일더를 추억할 것이다. 


마음으로 보이는 진가를 가졌던 진 와일더를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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