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좋아했던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기를 잘한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만 골라 좋아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만큼 재능 있는 배우들이 많다는 뜻이다. 제이미 벨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에서 연기를 잘하는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그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설명하기에는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정말 많다.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제이미 벨을 「빌리 엘리어트」로 먼저 알게 되었다. 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보는 영화 중 하나라면 바로 빌리 엘리어트가 아닐까.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교육적인 영화 중 하나임이 분명하니까. 나도 물론 빌리 엘리어트를 자의로 본 것은 아니다. 내 기억에는 2번쯤 본 것 같은데 한번이 학교에서라면 한번은 언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빌리 엘리어트는 배우 개인보다는 극의 구성에 더 집중해서 본 영화였다. 보수적인 시선을 탈피하고 자기만의 진로를 걷는 빌리 엘리어트의 삶이 너무 눈부셔서 배우의 재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연기 잘하고 춤 잘 추는 아역 배우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한번 보게 되었는데 내가 보는 눈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제이미 벨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하게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번째로 제이미 벨을 접한 영화는 「설국열차」였다. 안타깝게도 빠른 퇴장으로 인해 이 영화에서 내게 남은 벨의 이미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벨의 역할인 에드가보다 그레이, 커티스, 요나 같이 존재감 뚜렷한 캐릭터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알고 있었던 배우였지만 영화 속에서는 별 달리 인상 깊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짜릿했던 장면의 대사: "They've got no bullets!"이 벨의 것이었다.
세번째는 「님포매니악」이다. 제이미 벨이 맡은 K라는 캐릭터가 존재감이 크다는 얘기는 영화 보기 전에도 많이 들렸다. 사실 이 영화는 그 파격적인 수위가 궁금했고 스테이시 마르텡 때문에 보게 된 것이었다. 볼륨 1에서는 K가 나오지 않는다. 볼륨 2 중반이 되어서야 나오는 15분 남짓의 짧은 분량이 전부이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K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K는 평면적이지 않다. 가학성애를 갖고 있음에도 그는 저질스럽지 않고 오히려 근사하게 보인다. 비즈니스 도미니트릭스인 그가 매력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난데에서는 제이미 벨이 기여한 바가 크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에 차분하면서도 예민한 연기가 돋보였다. 벨을 좋아하기 전에 봤던 영화 3편 중 개인적으로 가장 평이 나빴던 님포매니악에서 벨의 임팩트는 압도적이었다. 그건 아마도 님포매니악이 좋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보다 배우가 더 다가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에서 벨의 캐릭터는 단연 독보적이다.
이렇게 영화 3편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미 벨은 내게 그닥 매력적인 배우가 아니었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영화는 「더 이글」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브리튼인 노예, 한때는 부족장의 아들이었던 에스카를 연기한다. 에스카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리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화를 시작하고 27분이 지나서야 나오지만 에스카는 대사가 없다. 그는 그저 눈빛으로 모든것을 설명하고 다시 등장한다. 등장 이후에도 에스카는 그리 대사가 많지 않다. 그는 열 마디 말보다 침묵으로 전하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변화도 그리 크지 않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다가 영화가 딱 중간지점에 도달했을때야 분노를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마지막에서야 미소를 짓는다. 당연히 연기하기에 까다롭다.
게다가 에스카의 서사는 관객 입장에서도 그리 설득력이 없다. 에스카는 브리튼인으로서 로마인에게 고향과 가족을 잃었다. 심지어 그의 주인인 마커스의 아버지는 브리튼 정복 전쟁 선두에 나와있는 인물이다. 비록 마커스에 의해 목숨을 구했지만 에스카는 그와의 첫 대면에서 썩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에스카는 의아하게도 마커스의 수술을 전후로 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거둔다. 독수리 휘장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서 에스카는 마커스를 죽이거나 그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에스카가 다른 브리튼인들에게서 마커스를 지켜주었다는 것은 그의 대사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중반이 되어서야 분노를 터뜨리는 에스카가 마커스에게 말한다. "And you'd be dead in a ditch without me!" 즉 에스카는 마커스를 지켜준 것이다. 이후 바다 표범족을 만난 에스카에게는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바다표범 족은 로마인에게 적대적이고 쿠노빌 족장의 아들이었던 에스카에게 호의적이었다. 에스카는 마커스를 영원히 노예로 부릴 수 있었고, 혹은 그를 정말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에스카는 다시 마커스에게 돌아간다. 심지어 같은 브리튼인이었던 바다표범족과 전투를 한다. 마커스에게 목숨을 구해졌기 때문에 그에게 충성한다기에는 의아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런 빈약한 개연성은 제이미 벨의 연기로 채워진다. 그의 눈빛과 무게감은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무언가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고 드디어 나는 제이미 벨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배우를 좋아하게 되면 무조건 필모그래피를 먼저 훑어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할람포에서 관음증 청년, 춤스크러버에서 우울증 소년, 니콜라스 니클비에서 절름발이 소년. 이렇게 세 편을 연달아보았고 그의 자유분방한 변화에 감탄했다. 빌리 엘리어트의 바로 다음 영화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니콜라스 니클비에서의 연기가 특히 훌륭했다. 다리를 저는 연기도 굉장히 섬세했는데 캐릭터가 갖고 있는 순수하고 무해한 이미지가 바로 그 전의 빌리 엘리어트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이었다. 벨은 스마이크를 연기할 때 빌리 엘리어트를 갖고 오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자신의 스마이크를 구축해냈다. 발레리노 다음의 캐릭터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이미지 탈피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지금봐도 스마이크는 벨이 연기한 캐릭터들 중에 가장 결이 다르다.
제이미 벨의 이미지는 데스워치까지 순수한 소년이었고, 킹콩까지는 반항아였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깃발, 할람 포, 디파이언스, 점퍼, 제인에어를 거쳐가며 점점 다양한 인물을 시도했다. 리트릿에서는 폭력적인 군인을 연기했는데 이 영화에서 제이미의 연기는 마찬가지로 훌륭한 배우인 킬리언 머피에게도 지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빌리 엘리어트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사실 니콜라스 니클비에서도 빌리 엘리어트는 없었다.
나는 그의 연기가 확신을 가진 연기라고 정의한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촬영하고,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안다. 단 한번이라도 의문이나 불안이 없다. 그는 과거의 캐릭터를 빌려오는 방식으로 연기를 하지 않고 언제나 캐릭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몸에 맞춘다. 그 과정에서 벨은 절대 돌아보지 않는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다. 하지만 벨의 연기는 특별하다. 곧 전주영화제 폐막작으로 만날 스킨에서의 벨도 기대된다. 트레일러로 잠깐 그의 연기를 감상했는데 역시나 이전 영화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매력이 또 생겨났다. 여름에 개봉할 로켓맨에서의 벨 또한 빨리 만나보고 싶다. 벨의 필모그래피가 전반적으로 재밌지는 않았다. 솔직히 재미있는 영화보다 재미없는 영화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게 전혀 지겹지 않았다. 벨의 연기는 재미가 있든 없든 모든 영화에서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문득 튀어나오는 벨의 춤솜씨를 보면 마치 고전영화 속의 배우들이 떠오른다. 뮤지컬이 유행했던 시기에 배우들은 연기 뿐만 아니라 춤도 노래도 잘해야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로켓맨에서 제이미 벨은 춤 뿐만 아니라 노래도 할 수 있다고 증명해보였다. 그를 보면 한 때 고전 할리우드의 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안타깝게도 고정된 역할을 탈피하려는 그의 부던한 노력 때문에 빌리 엘리어트 이후로 춤을 추는 영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간간히 킹콩이나 필름스타 인 리버풀에서 짧게나마 등장하는 댄스씬에서 그의 춤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