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와 진 와일더

The Little Prince and Gene Wilder

by loev

https://youtu.be/SVi3-PrQ0pY

Pure Imagination - 초콜릿 천국 (1971)

1971년의 초콜릿 천국을 봤다면, Pure Imagination을 부르는 진 와일더를 봤다면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은 소름 끼치는, 절대 친절하지 않는 진 와일더의 윌리 웡카는 그 기묘함 자체가 매력이다.


와일더의 웡카 연기가 강렬할 정도로 인상적이라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았다. 그 중에 내가 아는 익숙한 이름은 어린 왕자. 1974년 뮤지컬 영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영화인 사랑은 비를 타고의 감독 스탠리 도넌이 메가폰을 잡았다. 웡카로 와일더에게 흥미를 가진 나는 어린 왕자를 찾아 보았다. 진 와일더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 역할을 했고 러닝타임의 끝에 다다라서야 등장한다. 역시나 여기서도 근사한 노래를 부르는데 넘버의 이름은 바로 Cloer And Closer And Closer다.


https://youtu.be/NS5e9DW5QxM

Closer and Closer and Closer - 어린왕자 (1974)

서서히 친해지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관계를 하나의 곡으로 요약했는데 나는 여기서 진 와일더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여우로 분장한 진 와일더는 혼자서 미친듯이 어린 왕자 주변을 뛰어다니다가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어린 왕자의 작은 손에 제 손을 올려놓는다. 결코 쉽게 다가간 것이 아니고 그의 조심스런 접촉은 어린 왕자가 뺨을 살짝 어루만져주는 것으로 보답 받는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여우와 어린 왕자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숲 속을 뛰어다니며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인연도 끝이 찾아온다. 이때 진 와일더는 물기 있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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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날 것 같아."


어린 왕자는 그의 이름대로 아직 어리숙해서 위로 하는 방법을 모른다. 너무 어려 이별의 슬픔을 모르는 탓인지 어린왕자는 다소 냉정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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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하고 싶지 않지만 길들여달라고 한 거 너였어. 너한테 해준게 없으니 시간만 낭비한 셈이야."


눈동자 위로 서글픔이 빛나는데도 여우는 다정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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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네가 나한테 낭비한 시간은 내게 자부심을 심어줬어."


그리고 여우는 떠나는 어린 왕자에게 다급히 달려가 종이를 내민다. 이별의 선물로 그는 자신만의 비밀을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종이에 소중히 적어 건네는 비밀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나였다. 곧 이어 어린 왕자와 꼭 끌어안는 여우를 보며,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칼이 생각난다는 갈대밭(이제 그 갈대밭은 여우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비밀을 속삭이는 여우를 보며 계속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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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안 보이니까."


그 대사를 끝으로 더 이상 진 와일더는 나오지 않는다. 분량만 두고 보자면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작은 부분 때문에 이 영화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다. 당연히 영화가 주는 울림 때문에 눈물이 흘렀지만 진 와일더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와 여우는 다시 만날 수 없었으니까. 우리가 이제 진 와일더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진 와일더는 2016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에도 난 그런 배우가 있는줄 몰랐다. 집에 있는 무비스타 501 이라는 책에 진 와일더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도, 몇번이고 읽었던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이라는 책에 진 와일더의 영화가 세 편이나 실려 있는데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 이별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랑하자마자 이별하게 되는 심정은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


어린 왕자를 시작으로 진 와일더의 영화를 네편 연달아 보았다. 영 프랑켄슈타인, 프로듀서, 블레이징 새들스, 실버 스트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제외하면 세편 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들이다. 실버 스트릭은 70년대 영화답지 않은 세련된 스릴이 있고 프로듀서는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상식이 붕괴되는 듯한 코미디다. 블레이징 새들스의 마지막 장면 또한 예측불허하고 영 프랑켄슈타인의 말장난은 아직도 낄낄거리며 보기 좋다. 그리고 그 영화 네편 속에서 항상 자신의 역할을 맡은 바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진 와일더가 있다. 코미디 전문 배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처음인데 영화 마지막에 항상 웃으며 끝낼 수 있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 웃고나면 이제는 필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그가 그리워 또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그저 슬퍼하는 방식으로 애도하지는 않는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의 죽음으로 다시 장미에게 돌아갔듯 모든 영혼들은 돌아갈 각자의 행성이 있을 것이다. 진 와일더도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행성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의 행성은 분명 재밌고 웃음이 많은 곳일 것이다.


그를 알고 난 뒤 깊은 사랑을 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시간은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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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인 대상에게는 책임감이 생긴다. 길들인 순간부터 여우는 그냥 여우가 아니다. 어린왕자가 길들였던 자신의 장미를 하나 뿐인 장미로 여겼듯이 내게도 진 와일더는 그저 영화 배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우에게 아무 의미 없던 밀밭이 어린왕자를 추억하는 것처럼 아마 나도 어린왕자를 보면 진 와일더를 추억할 것이다.


마음으로 보이는 진가를 가졌던 진 와일더를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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